정기 인사철 아닌데도 전격 인사
엔비디아 품질검증 순조롭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이재용 회장의 결단이라는 면에서 기대
기업의 ‘인사(人事)’를 보면 그 기업이 처한 상황과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인사를 메시지라고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삼성전자의 반도체 수장 교체는 실망과 기대가 교차하는 변곡점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삼성전자의 가장 큰 현안은 HBM 반도체가 엔비디아의 샘플 검증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서 반도체 수장을 바꿨다는 것은 검증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실망을 안겨줄 만하다. 그러나 취임 이후 1년 반이 지나도록 자기 색채를 보이지 않던 이재용 회장이 처음으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기대를 갖게 한다.
◆ 삼성전자 HBM 반도체, 말만 앞세운 양치기 소년 꼴
작년 초부터 HBM 반도체가 화두로 등장했을 때 삼성전자가 보여준 일련의 태도는 그때까지 우리가 알던 ‘초격차’ ‘기술 우위’의 삼성전자가 아니었다. 경쟁사에 뻔히 뒤지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1위라고 우기기도 했고 뒤처졌음을 시인한 이후에는 곧 따라잡을 것처럼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그래서 삼성전자가 “기술을 개발했다.” “양산에 들어간다.”는 발표를 해도 시장의 반응은 수율을 봐야 한다든지 납품이 결정됐는지를 지켜보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삼성전자가 양치기 소년이 됐다는 한탄이 나오기까지 했다.
◆ 엔비디아 품질검증, 또 기대에 그치나?
그러다가 분위기가 바뀐 게 지난 3월이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미국 새너제이에서 3월 21일 열린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삼성전자 부스를 방문해 HBME3 12단 제품에 대해 ‘승인(APPROVED)’이라는 글을 쓰고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이때부터 드디어 삼성이 경쟁사를 따라잡고 앞서 나갈 것이라는 기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4월 30일, 1분기 실적설명회에서 김재준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이 시장의 기대를 한껏 키웠다. HBM3E는 고객사의 출시 일정에 맞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2분기 말부터 매출이 발생할 것이며 업계 최초로 12단 제품의 샘플(시제품)을 공급했다고 말했다. 이는 삼성전자의 12단 HBM3E가 이미 엔비디아의 퀄테스트(품질검증)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 말이었다.
12단 제품이 품질검증을 통과한다면 경쟁사를 6개월 이상 앞서게 된다는 점에서 시장의 기대를 부풀린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일희일비하는 추측성 얘기만 떠돌고 있다. 그러다가 지난주, 품질검증과 관련해 삼성전자 임원들이 엔비디아로 급파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비관적인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수장이 교체됐다는 소식은 비관론에 힘을 싣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삼성전자의 양산 일정을 감안하면 이달 말까지는 품질검증을 통과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이번에도 틀어지는 것 아니냐는 실망감이 커지고 있다.
◆ 이재용 회장 의중이 반영된 위기탈출용 인사
다만 이번 인사를 놓고 이재용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위기탈출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 2022년 10월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 이후 삼성의 행보를 놓고 안팎에서는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회장 취임 이후 두 차례 정례 인사에서도 ‘안정’이 주요 메시지였다.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정기 인사철이 아닌 때에 반도체 수장을 바꾼 것은 이재용 회장의 승부수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경계현 사장이 스스로 사의를 밝혔다고 하지만 이번 인사는 이재용 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마치 고 이건희 선대회장이 취임 이후 1년 4개월 만인 2011년 7월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불시 인사’ 카드를 꺼낸 든 것에 비유하는 분위기다.
이번에 반도체 수장으로 오른 전영현 부회장에 대해 거는 기대도 크다. 메모리사업부장을 맡았던 2014년∼2017년에 세계 최초로 20나노, 18나노 D램 양산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를 2년 이상으로 크게 벌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갤럭시 노트7의 배터리 화재로 문제가 됐을 때, 배터리 공급사인 삼성SDI 대표를 맡아 위기를 돌파한 전력도 가지고 있다.
우리 국민 가운데 대다수는 삼성의 기술력을 믿는다. 코로나 사태에서 잔류량을 최소화하는 주사기 개발에 앞장섰고 심지어 김치공장의 자동화에도 공을 세웠다. 주주가 6백만 명에 달해서 국민 기업이 아니라 기술 경쟁력에서 국민이 자부심을 갖는 국민 기업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삼성전자가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파이낸셜투데이 김기성 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