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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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허전하네요.”

지난 4일, 대통령 이재명이 2026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 오르며 던진 첫마디다. 텅 빈 국민의힘 의원석을 바라본 그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자조이자, 국격(國格)의 추락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야당은 전날 의원총회를 열어 시정연설 불참을 결정했다. 전 당 대표 추경호에 대한 내란특검의 구속영장 청구를 “야당 탄압”으로 규정하고, 본회의장 대신 로텐더홀에 모여 상복 차림에 검은 마스크를 쓴 채 시위를 벌였다. 대통령이 등장하자 “꺼져라”, “범죄자”, 재판 받으라는 고성이 터졌고, “이재명식 정치탄압 폭주정권 규탄한다”는 구호가 이어졌다. 국회는 순식간에 조롱과 분노의 광장으로 변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 이벤트’가 아니다. 헌법이 보장한 국정 절차의 현장을 정파적 감정과 극단의 언어로 짓밟은 국격의 모독이었다. 시정연설은 대통령이 행정부의 예산안을 국민의 대표 앞에서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헌법상의 의례이자 최소한의 협치 상징이다. 그러나 야당은 이마저도 보이콧하며 국정의 기본 틀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모욕을 넘어선 능멸, 대통령은 이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비판과 견제는 야당의 본령이다. 그러나 감정적 반발로 의회를 무력화하는 것은 ‘책임정치’의 반대말이다.

“이제 전쟁이다. 이번 시정연설이 마지막 시정연설이 돼야 한다.”

국민의힘 대표 장동혁의 발언이다. 대통령의 연설을 앞두고 “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외친 그의 언사는 민주주의의 토론을 ‘적대의 정치’로 바꾸는 선언이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투쟁’이 아니라 ‘토론’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국회는 논쟁 대신 막말이, 설득 대신 혐오가 자리 잡았다. 상대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이 정치의 수단으로 둔갑했다. “전쟁”이라니, 도대체 누가 누구와 싸운다는 말인가.

그 결과 남은 것은 국민의 피로와 냉소뿐이다. 한 보수신문 기사 댓글은 이렇게 말한다.

“국민의힘 정말 머리가 없다. 국민의 짐 좀 되지 말고 제발 입 다물고 가만히들 있어라! 앞으로도 계속 국회 본회의 참석하지 마라. 너희들 때문에 어깨가 더 내려앉는다. 왜 저리 생때만 쓰는 건지 알수가 없다. 국민의힘이 국민들을 더 힘들게 한다는걸 왜 모르나.” 오늘의 민심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하면 속단일까?

한겨레신문은 국힘의 시정연설 보이콧을 두고 이렇게 지적했다.

“국힘 전 대표 추경호는 12·3 내란 당시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 배후와 동기를 규명하는 것은 특검의 책무이자 국민의 요구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내란 피의자’ 한 명을 지키겠다며 정권 타도를 외친다.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비판의 핵심은 분명하다. 정당이 한 개인을 지키기 위해 헌정 절차를 무너뜨리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패거리 짓’이라는 것.

“국민의힘은 진정으로 내란 비호 정당의 오명과 위헌 정당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추 경호의 오도에 이끌려 의원 대다수가 계엄 해제 표결에 불참한 데 대해 진심어린 반성과 사죄부터 내놔야 한다. 나아가 그 치욕적 행위의 배후를 밝히기 위한 수사를 자청하고 협조해야 마땅하다. 그럼으로써 당내 내란 세력과 스스로 먼저 철저히 단절한다면 국민도 국민의힘과 내란 세력을 분리해 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문대림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는 꾀마다 죽을 꾀를 낸다’ 하더니 하는 일마다 자멸의 길만 선택하는 국민의힘의 행보는 이제 연민마저 느껴질 지경”이라는 것이다.

토론이나 숙의 대신 혐오와 적개심이 난무하는 정치풍토,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텔레비전 토론이나 시사 프로그램에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여야를 각기 편드는 인사들이 서로를 향해 비난을 퍼붓고, 어불성설의 구상유치한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 내고 있다. 합리적 토론은 실종된 지 오래됐다. 진영 논리에 갇힌 언어는 국민을 갈라놓고 사회적 혐오를 부추긴다. 억지와 생떼, 아전인수와 왜곡이 난무하는 이 풍경 속에서 ‘대변인’들은 이미 상식을 갖춘 국민의 지성이 아닌 진영의 전사다. 그들에게서 ‘정의’란 말은 이미 남의 나라 말이다.

방송은 이제 그 구도를 바꿔야 한다. 여야 대표를 ‘대결’시키는 대신, 균형감 있는 기자나 앵커가 한쪽 인사와 대화하는 방식으로 구성해야 한다. 소위 ‘게이트 키핑’이 있어야 한다. 공론장이 ‘아무 말 대잔치’로 전락하는 이유는, 방송이 그걸 걸러내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인가, 국개의원인가?”

국민이 내뱉는 이 비아냥에는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깊은 절망이 담겨 있다. 민주주의의 품격은 제도보다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법과 절차가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을 운용하는 정치인들이 책임과 품위를 잃으면 국회는 ‘막장 정치의 무대’로 전락한다.

3김 정치의 한 축이었던 김종필은 정치를 ‘허업(虛業)’이라 부르며 “정치는 말자(末者)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한탄했다. 오늘의 정치인들을 보면서 그를 다시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백번 옳은 말씀이다.

국록을 받는 이들이 국민 앞에서 분노와 증오를 연출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공복(公僕)이 아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지금 한국 정치가 잃어버린 것은 품격과 절제, 그리고 최소한의 국격 의식이다.

국민은 싸움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국민의 대표인 '선량'들의 ‘반듯한’ 행동거지를 보고 싶어 할 뿐이다.

국격의 회복은 결국 협치에서 시작된다

대통령은 이날 시정연설에 앞서 국회의장과 조국신당의 조국,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등과 20여분간 환담했다.

“APEC 정상회의에서 보니 각국 정상들이 정말 열심히 하더라. 나도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차이를 넘어 국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힘을 모아달라.”

대통령의 이 말은 원론적이지만, 정치는 본디 그 ‘원론’을 지키는 데서 출발한다. 그날의 국회가 남긴 질문은 결국 하나다.

“그대들은 과연, 국민의 대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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