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우리나라 국회의 특징 중 하나는 ‘고성(高聲)의 일상화’다. 거의 모든 상임위원회에서 일주일에 한두 차례 이상 고성이 오간다. 이렇듯 빈발하는 고성은 우리 정치의 양극화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고성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고성이 단지 정치적 양극화의 상징이 아니라, 현재 국회에 대한 희망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본래 여당은 두 가지 역할을 균형 있게 수행해야 한다. 하나는 입법부의 일원으로서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이며,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 속한 정당으로서 정부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민주당은 입법부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입법부의 구성원이라면 정부의 행위를 감시하고 견제하면서 현재의 정권을 성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정권의 방패막이 역할에만 몰두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은 ‘계엄 세력’과 절연하지 못하는 국민의힘도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민주당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는 그와 같은 우려를 일정 부분 불식시킬 수 있는 장면이 연출됐다. 바로 국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의 ‘고성’이 그것이다.
지난 11월 18일 국회 운영위 회의에서는 대통령실 김용범 정책실장과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 사이에 격한 설전이 벌어졌다. 김은혜 의원이 김 정책실장에게 딸의 전세 문제를 언급하며 질의하자, 이에 김 실장이 고성으로 반발하면서 상황이 격화되었다. 우상호 정무수석이 김 실장을 제지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 실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김병기 위원장이 “정책실장! 정책실장!” 하고 외치며 “뭐 하는 겁니까. 여기가 정책실장이 화내는 곳입니까?”라며 강하게 질책했다. 이 고성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닌, 그동안 민주당이 보여줬던 ‘정권의 방패’ 이미지를 상당 부분 씻겨내는 ‘희망의 소리’였다. 민주당도 입법부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병기 원내대표의 이러한 태도는 정치인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모습이다. 장관급인 상임위원장이라면 입법부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인식하고, 위원회를 중립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상당수의 국회 상임위원장에게서 이러한 역할 인식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 원내대표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인상을 줬음이 분명하다.
사실 김병기 원내대표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비록 파기됐지만, 지난 9월 여야가 특검법 연장과 관련해 합의를 도출했던 사례 역시, 그가 없었더라면 합의에 이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병기 원내대표와 민주당 문진석 원내수석부대표는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와 비교적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지난 11월 3일에는 국민의힘 유상범 원내수석부대표 지역구의 국회 장터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 김 원내대표가 직접 참석했다. 또한 문진석 원내수석부대표와 유상범 부대표는 사석에서 서로를 ‘형’, ‘상범아’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관계라고 한다.
정치란 본래 이래야 한다. 정치는 상대를 적으로 여기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곧 투쟁으로 전락한다. 과거 군사 독재 시절에는 상대 정당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정치인을 ‘사쿠라’라 부르며 폄훼하기도 했지만, 그 시절엔 애초에 제대로 된 정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정치가 사라질 이유가 없음에도 정치가 점점 실종되고 있으니, 이를 복원해야 할 책임이 여야 정치인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병기 원내대표와 문진석 원내수석부대표 같은 인물이 먼저 야당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그 손을 잡는 야당 원내 지도부도 칭찬받을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민주당을 좀 더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민주당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국민의힘과 협의 없이 처리하려 들었는데, ‘모처럼’ 그렇지 않은 여당 원내 지도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석수에서 우위를 점한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상대적으로 열세인 쪽에서도 내민 손을 잡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점을 여당은 인식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김병기 원내대표가 보여준 모습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특히 강성 지지층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정치 환경에서 정치인이 이처럼 유연하고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김병기 원내대표와 문진석 원내수석부대표의 행보가 더욱 돋보인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정치가 조금이라도 살아나기를 바란다. 물론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사라져가는 정치를 되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번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있었던 장면은 그런 절망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한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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