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공약이 사라졌다’라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각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이 매우 빈약하다는 비판인데, 이러한 지적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점이 있다.

우선, 공약과 슬로건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747’이나,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내세운 ‘경제 민주화’, 그리고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의 ‘공정과 상식’은 공약이라기보다는 슬로건에 가깝다.

‘경제 민주화’라는 표현은,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고, ‘공정과 상식’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그 가치가 훼손됐다고 지적하는 것까지는 알겠지만, 이를 어떻게 회복하겠다는 방안은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모호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애초에 공약이 아니라 슬로건이기 때문이다. 슬로건은 대개 후보의 이미지를 만들거나 강화하는 데 사용되는 수단이다.

반면, 공약은 슬로건처럼 추상적인 이미지 창출의 도구가 아니라, 훨씬 더 정교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 가령 어떤 후보가 공약을 제시한다면, 그 실현을 위한 재원 마련 방안, 예상되는 부작용,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공약이 중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일반 국민은 생업에 바빠 공약의 실현 가능성과 현실성을 따져보기가 어렵다. 게다가 이를 제대로 판단하려면 일정 수준의 전문성까지 요구된다. 결국, 시간도 부족하고, 전문성도 갖추기 쉽지 않기 때문에, 일반 유권자가 공약의 적실성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권자들이 공약을 보고 후보를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착각’의 본질은 다름 아닌 공약과 슬로건의 혼동에서 비롯된다. 많은 유권자들은 슬로건을 공약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으며, 정치권은 오히려 이 점을 역이용하기도 한다. 슬로건을 마치 공약인 것처럼 포장함으로써 후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정치가 이미지 중심으로 작동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반대로, 공약은 이미지 창출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이미지는 감성의 영역이지만, 공약은 이성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공약을 직접 이미지와 연결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정치권은 슬로건을 공약처럼 포장하여 감성과 이성의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슬로건을 내세운다 해도, 정치인의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치인의 이미지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는 축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선거 시즌에 슬로건을 활용해 이미지를 보완하려 해도,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들은 후보의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지금은 명백한 ‘이미지 정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대선을, 공약은 실종되고 네거티브만 난무하는 선거라고 비판한다. 일정 부분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네거티브 전략은 우리나라만의 특수 현상이 아니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가 치러질 때, 네거티브 캠페인은 흔히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네거티브 캠페인이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네거티브 전략이 유권자들의 반감만 초래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단지 비난만 받는 전략이라면 왜 굳이 네거티브 캠페인을 하겠는가를 묻고 싶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유권자들은 이성적으로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비난하지만, 감성적으로는 그 내용을 기억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네거티브 전략이 집중되는 시기는 선거일 2주 전부터다. 이 시점은 상대에게 충분한 반격의 시간을 주지 않으면서도, 유권자들의 인식에 캠페인의 내용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TV 토론에서 네거티브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상 ‘선거 전략 교과서’에 충실한 움직임이라 볼 수 있다.

정치는 생물이다. 생물이 진화하듯, 정치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의 방향은 옳고 그름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진정한 공약을 바탕으로 투표를 하고, 네거티브 전략을 배격하고 싶다면, 그러한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 세력을 선택해 표로 심판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선택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당위적으로 옳은 말이 현실 정치의 복잡성과 대중 심리 앞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가 바로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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