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 전 한국선거학회 회장
12·3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 정치권에서는 개헌 논의가 점차 확산하고 있다. 여야 양쪽에서 1987년에 구축된 현행 헌법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87년 개헌 이후 선출된 대통령 8명 중 3명(노무현, 박근혜, 윤석열)은 재임 중 탄핵소추돼 1명(박근혜)은 파면(박근혜)됐고, 1명(윤석열)은 구속된 채 헌재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대통령의 비극적 결말을 반복하는 ‘87년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KBS·한국리서치 조사(2024년 12월29~31일)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61%였다. 올해 들어 실시한 조선일보·케이스탯리서치 조사(1월21~22일)에서도 55%가 개헌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개헌 방식은 다양하게 분출되고 있다. 그중에서 현재 5년인 대통령 임기를 3년만 하고 개헌을 통해 2028년에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실시하는 ‘임기 단축 개헌론’이 주장이 대세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우리 당에서 어떤 후보가 되더라도 그다음 총선(2028년) 시기에 맞춰서 대통령 임기를 3년만 하고 물러나자”고 했다.
유승민 전 의원도 “민주당 반대로 (권력 구조 개편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다음 대통령 임기 초반에 개헌을 하자”며 “2028년 총선에 맞춰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하고, 개헌하는 대통령은 중임(重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한동훈 전 대표도 “만약 올해(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새 리더는 4년 중임제로 개헌하고, 자신의 임기는 3년으로 단축해서 2028년에 총선·대선을 함께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선 김동연 경기지사가 대구에서 열린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초청 특강에서 “분권형 4년 중임제 대통령, 책임 총리제 등을 포함한 권력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며 “조기 대선이 이뤄진다면 다음 대통령은 차기 총선과 주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임기는 3년으로 단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김두관 전 의원도 차기 대통령 임기를 2025년부터 2028년까지 3년으로 단축하되 중임할 수 있도록 단서 조항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87년 체제’에선 대선(5년)과 총선(4년) 주기가 맞지 않아 대통령은 임기 도중에 총선을 치르느라고 장기 국정 과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5년 단임제에서는 책임 정치를 실현하기가 불가능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총선·대선을 같이 치르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임기 단축 개헌론 못지않게 ‘분권형 개헌’ 논의도 활발하다.
오세훈 서울시장 지난 2월 12일 국회에서 '87 체제 극복을 위한 지방분권 개헌 토론회’를 개최했다. “서울·수도권을 제외한 4개 권역별 초광역 지방자치단체를 만들어 과감하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5대 강소국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오 시장은 “대통령에게는 외교·안보·국방에 관한 권한만 남겨놓고 내치와 관련된 모든 권한은 광역화된 지자체에 이양하는 것”이라며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과감히 지방정부에 넘기는 것이 어떤 권력구조 개편논의보다도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도 지방분권 개헌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 15일 김부겸 전 총리는 “권력 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뿐만 아니라, 지방분권형 개헌 논의도 필요하다”며 “2026년 세금을 정하고 걷는 것부터 시작해 교육·경찰·자치권을 지자체에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개헌 논의가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려면 몇 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첫째, 권력구조 개편에만 치중해서는 안 된다. 헌법은 ‘국가의 기본 법칙으로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국가의 정치조직 구성과 정치작용 원칙을 정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역사가 녹아 있는 정신이다.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주로 ‘4년 중임 대통령제’,‘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순수내각제’ 등 권력 구조 개편에만 맞춰져 있었다.
단언컨대, 권력 구조를 ‘4년 중임 대통령제’로 바꾼다고 제왕적 대통령이 사라지고 국정 운영의 효율성이 담보될 수 없다. 대통령제가 효율적으로 운용되기 위한 대원칙은 ‘4년 중임’이 아니라 견제와 균형이다.
개헌 논의가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만 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다수 의석을 갖고 있는 야당의 폭주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 오세훈 시장이 개헌을 통해 의회에는 내각 불신임권, 정부에는 의회 해산권을 부여해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째, 개헌은 권력구조, 국회구조, 정당구조, 선거제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는 개헌과 함께 정치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통령 중임제 등의 권력 구조는 민주 정치 운영을 위한 하드웨어에 불과하다. 다수결 원칙의 존중, 소수자에 대한 관용, 대화와 타협 등이 성숙한 대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소프트웨어이다. 이러한 소프트웨어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어떠한 권력구조 개편도 그 효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대화와 타협, 자제와 관용, 협치와 책임 등의 가치가 살아 숨 쉬는 정치문화를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정치 개혁에 나서야 한다. 특히, 제왕적 대표 체제로 상징되는 중앙집권화되고 비대화된 전근대적인 정당구조를 바꾸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셋째, 개헌은 정치적 거래와 편의주의에서 벗어나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의돼야 한다. 정대철 헌정회장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분산 개헌은 이 시대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이자 시대적 요청이며 국민의 명령”이라면서 “위대한 대한민국의 제7공화국 시대를 열기 위해 국민 모두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한다”고 했다.
정치권에선 지금이 개헌의 골든타임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에 반해 홍준표 대구시장은 단계적 방식의 개헌론 구상을 공개했다. 차기 정부가 2028년 총선일에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하고, 이로부터 2년 뒤인 2030년 지방선거에선 차차기 대선도 함께 치르자는 구상이다. 홍 시장은 “총괄적 헌법 정비에 드는 시간이 두세 달 갖고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87년 헌법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만 한계도 노출됐다. 무엇보다 개헌이 졸속으로 추진되면서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라는 정치 공학적인 사항만 부각됐다. 87년 헌법 체제 이후 38년이 지난 지금 사회, 경제, 정치적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가치와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새 헌법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서 국민의 삶에 적합한 법적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개헌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심도 있게 논의돼야 한다. 그래야만 새 헌법이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대표는 개헌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만난 자리에서 “현재로는 내란 사태에 집중해야 하지만 (개헌 의견 수렴 기구 설치) 제안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2022년 대선 때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 대표만 동의한다면 개헌이 본격 추진될 수 있다. 이 대표도 적극적으로 개헌 논의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기 대선은 ‘개헌 거부 독자 세력’ 대 ‘개헌 옹호 연대 세력’간의 치열한 경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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