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구를 지켜라!'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지구를 지켜라!'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 대중은 때때로 명작의 진가를 인지하지 못하고 외면한다. 개봉 시기가 블록버스터와 겹쳐 외면받은 영화, 대중의 취향과 동떨어져 있었으나 작품성을 뒤늦게 인정받은 영화 등 사연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중은 ‘재평가’를 통해 명작의 참모습을 확인한다. 대중의 눈과 귀에서 잊히지 않고 훗날 재평가된 영화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주인공 병구(신하균 분)는 이태리 타올로 강만식 사장(백윤식 분)의 발등을 문지르고 물파스를 바른다. 사진=지구를 지켜라! 캡처
주인공 병구(신하균 분)는 이태리 타올로 강만식 사장(백윤식 분)의 발등을 문지르고 물파스를 바른다. 사진=지구를 지켜라! 캡처

◆ ‘1987’ 감독이 20년 전 겪은 ‘흥행 굴욕’

참신한 시나리오라는 호평을 받고도 전국 관객 7만3132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통계)에 그친 작품이 있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지구를 지켜라!’다. 손익분기점이 100만명이었으니 당연히 적자를 면치 못했다. 흥행 성적으로 따지면 장준환 감독의 장편 영화 3편 중 유일하게 ‘굴욕적인’ 작품이다.

영화 관계자들은 엉뚱한 포스터를 필두로 한 잘못된 마케팅을 흥행 실패 원인으로 지목했다. 포스터만 보고 코미디 영화나 전체 관람가 영화로 오해하는 관객이 많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스릴러나 SF에 가깝기 때문이다. 주연을 맡은 신하균 배우의 미소와 연두색 계열의 밝은 배경, 아기자기한 글꼴(폰트) 등 포스터에 포함된 모든 구성요소는 영화의 암울한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다.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시리즈에 출연한 김중혁 작가는 “이 포스터는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관의 4분의 1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실제로 포스터를 보고 나서 영화를 본 사람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병구에게 고문받는 강만식 유제화학 사장. 사진=지구를 지켜라! 캡처
병구에게 고문받는 강만식 유제화학 사장. 사진=지구를 지켜라! 캡처

◆ 관객은 외면, 평단은 극찬

흥행은 실패했지만, 평단은 장 감독의 손을 들어줬다.

이동진 평론가는 2003년을 우리나라 영화계 최전성기라고 언급하면서 2003년을 빛낸 작품으로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를 거론했다.

특히 지구를 지켜라!는 인상 깊은 데뷔작이라고 평했다. 이 평론가는 “21세기 국내 영화감독들의 데뷔작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지구를 지켜라!'와 '추격자(나홍진 감독)'를 택하겠다. 그만큼 눈부신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장준환 감독이) 개인적인 취향을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흥행 면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비운의 작품”이라며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의 핵심은 ‘독특함’에 있다. 상상력을 영화로 구현한 ‘과감함’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영화의 후반부를 보면 ‘설마설마’하는데, 그 설마가 실현되는 부분이 대단하다”고 덧붙였다.

박평식 평론가도 “상상력 하나는 장 주네, 팀 버튼과 맞먹는다”면서 칭찬 릴레이에 동참했다.

시상식에서도 저력을 발휘했다. 장준환 감독은 이 영화로 모스크바 영화제 은상(감독상)을 받았다. 백윤식 배우는 ▲제40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 ▲제24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제2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조연상 등 주요 영화제 조연상을 휩쓸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본색을 드러낸 외계인. 사진=지구를 지켜라! 캡처
본색을 드러낸 외계인. 사진=지구를 지켜라! 캡처

◆ 장준환 감독 “우리가 제3의 존재에게 어떻게 비칠지 고민했다”

외계인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되짚어본다는 설정은 참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겁고 어두웠다. 하지만 장 감독의 주관은 확고했다.

2020년 제7회 춘천영화제 ‘한국 SF의 스펙트럼’ 포럼에 참여한 장 감독은 데뷔작에 관해 “외계인을 묘사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3의 존재(외계인)에게는 어떻게 비칠지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을 ‘실패’로 간주한 외계인이 지구를 폭발하는 결말에 관해 장 감독은 “병구(신하균 분) 같은 미치광이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가 과연 행복할 수 있냐고 묻는 메시지였다”고 해설했다.

한편, 2020년에는 할리우드 리메이크 소식이 들려왔다. 2003년 데뷔작 흥행 실패라는 아픔을 맛봤지만, 적어도 작품성만큼은 인정받은 셈이다. 영화 ‘유전’과 ‘미드소마’를 연출한 아리 애스터 감독이 제작에 참여하고, 이미경 CJ 부회장이 총괄프로듀서를 맡는다. 리메이크 작품도 장 감독이 직접 연출한다. 아리 애스터 감독은 “‘미드소마’에 가장 큰 영감을 준 영화가 지구를 지켜라!”라고 언급한 바 있다.

장 감독은 재기에 성공했다. 2012년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로 9년 만에 장편 영화 감독으로 복귀하며 관객 239만명을 모았다. 2017년에는 ‘1987’로 무려 723만명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이뤄냈다.

파이낸셜투데이 양지훈 기자

실험에 실패했다고 판단한 외계인은 지구를 파괴한다. 사진=지구를 지켜라! 캡처
실험에 실패했다고 판단한 외계인은 지구를 파괴한다. 사진=지구를 지켜라!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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