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블레이드 러너'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 대중은 때때로 명작의 진가를 인지하지 못하고 외면한다. 개봉 시기가 블록버스터와 겹쳐 외면받은 영화, 대중의 취향과 동떨어져 있었으나 작품성을 뒤늦게 인정받은 영화 등 사연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중은 ‘재평가’를 통해 명작의 참모습을 확인한다. 대중의 눈과 귀에서 잊히지 않고 훗날 재평가된 영화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묘사한 2019년 로스앤젤렌스 도심. 사진=블레이드 러너 캡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묘사한 2019년 로스앤젤렌스 도심. 사진=블레이드 러너 캡처

◆ 리들리 스콧 감독, 박스 오피스 ‘흥행 참패’를 맛보다

블레이드 러너는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장편영화 27편 가운데 흥행 순위 10위권 바깥에 자리한 대표적인 ‘흥행 쪽박’ 영화다. 1982년, 그는 ‘블레이드 러너’로 흥행 참패의 쓴맛을 봤다. 이 영화에는 예산 2800만달러가 투입됐으나, 손익분기점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다. ‘에일리언(1979)’, ‘델마와 루이스(1991)’, ‘글래디에이터(2000)’ 등을 연출하며 2003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2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은 영국 대표 영화감독의 흥행 성적이라고 하기엔 초라하다.

개봉 당시 평단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고, 대중은 이질적인 세계관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시종일관 내리는 비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길거리의 주를 이루는 동양인, 도심을 활보하는 레플리칸트(복제인간) 등으로 대변되는 분위기는 대중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유토피아와 거리가 멀었다.

길가를 배회하는 릭 데커드(Rick Deckard, 해리슨 포드 분) 형사. 사진=블레이드 러너 캡처
길가를 배회하는 릭 데커드(Rick Deckard, 해리슨 포드 분) 형사. 사진=블레이드 러너 캡처

미국의 유명 평론가 레너드 말틴(Leonard Maltin)은 블레이드 러너를 두고 “뒤죽박죽 대본(muddled script)과 ​매력 없는 주인공(main characters with no appeal whatsoever) 때문에 패배한 프로덕션 디자인의 승리”라고 혹평하며 평점 1.5점(4점 만점)을 매겼다.

개봉 시기가 대작과 겹친 불운도 흥행 저조 요인으로 꼽혔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는 1982년 6월 11일부터 9월 17일까지 미국 박스 오피스 수익 2억5355만달러를 기록했다. 반면, 같은 해 6월 25일 개봉한 시기 블레이드 러너의 수익은 9월 17일까지 2702만달러에 그쳤다. E.T.의 10분의 1 수준이다.

레플리칸트(복제인간) 로이 배티(Roy Batty, 룻거 하우어 분)와 프리스(Pris, 대릴 해나 분). 사진=블레이드 러너 캡처
레플리칸트(복제인간) 로이 배티(Roy Batty, 룻거 하우어 분)와 프리스(Pris, 대릴 해나 분). 사진=블레이드 러너 캡처

◆ 대중과 평단의 재평가…SF 영화 ‘교과서’로 등극

하지만 시간이 약이었다. 블레이드 러너는 1980년대 주요 영상 매체였던 VHS(가정용 비디오) 대여 시장에서 호조를 보이면서 뒤늦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영구 보존하는 영화에도 선정(1993년 등재)되는 영예를 누렸고, 미국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100대 영화에도 뽑혔다.

극장 재개봉도 줄을 이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에서 2015년 재개봉했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2017년 재개봉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과 평론가들의 성향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문화부 에디터인 마틴 칠튼(Martin Chilton)은 블레이드 러너를 디스토피아 SF 영화의 걸작(A masterpiece of dystopian science fiction on film)이라고 평가했다.

고층 건물과 동양인이 등장하는 전광판은 사이버펑크 영화의 기본 문법으로 자리했다. 사진=블레이드 러너 캡처
고층 건물과 동양인이 등장하는 전광판은 사이버펑크 영화의 기본 문법으로 자리했다. 사진=블레이드 러너 캡처

◆ 사이버펑크 장르를 정의하다

블레이드 러너는 수십 년간 사이버펑크(cyberpunk) 장르의 시각적 효과를 정의한 작품으로 자리하면서 후세에 큰 영향을 줬다. 일본 만화가 오토모 가츠히로는 블레이드 러너의 영향을 받아 ‘아키라(Akira)’를 연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화의 배경인 ‘네오 도쿄’의 거리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묘사한 2019년 로스앤젤레스와 유사하다.

마천루를 포함한 고층 빌딩이 도시의 중심을 이루고, 동양인이 출연하는 대형 광고판이 등장하는 순간은 어느덧 사이버펑크 장르의 기본 문법이 됐다. 이것도 블레이드 러너가 정립한 비주얼이다. 게임 중에서는 CD프로젝트(CD PROJEKT)에서 개발한 ‘사이버펑크 2077’이 블레이드 러너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한편, 블레이드 러너는 시리즈물로 자리할 전망이다. 1982년 원작에서 30년 후 이야기를 다룬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가 2017년 이미 개봉했으며, 지난해 11월 리들리 스콧은 영국 BBC와 인터뷰에서 블레이드 러너 TV 시리즈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1982년 원작이나 2017년 블레이드 러너 2049와의 연관성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TV 시리즈는 2023년 이후 공개될 예정이다.

파이낸셜투데이 양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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