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과 희극을 넘나들며 5.18 다시 보기

[파이낸셜투데이=이지혜 기자]차밭이 보이는 암자에서 수행 중인 승려 여산(과거 민호)은 조카이자 딸인 운화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그의 기억은 30여 년 전 전남대를 다니던 야학 선생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민호는 전통찻집 아르바이트생인 윤정혜와 사랑에 빠져 있었고, 정혜의 동생은 민호를 친형처럼 의지하고 있었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 항쟁이 터지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정혜는 민호를 떠나보내고 도청을 사수하던 민호와 기준은 운명이 나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계엄사에 밀고한 민호는 고문 후유증과 함께 죄책감으로 인해 환각에 시달리는 정신이상을 겪고 삶을 포기한다.

자신을 들여다볼수록 진흙탕이고 거부하고 싶은 생, 결국 민호는 속세의 자신을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다. 민호와 정혜 사이에 생긴 딸 운화를 친형 진호가 거두었지만, 세월이 흘러 운화의 결혼에 이르러서는 끊을 수 없는 속세의 인연에 애달파 한다.

연극 <푸르른 날에>는 지난 2011년 대한민국 연극에 주어지는 모든 상을 휩쓸면서 연극계 최대의 화두가 되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에 휘말린 남녀의 30년 인생 역정을 구도와 다도의 정신으로 녹여낸 이 작품은, 연출가겸 작가 고선웅의 각색을 통해 촌철살인의 입담과 리듬감 넘치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연출가 고선웅이 정의하는 연극 <푸르른 날에>는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이다.

서로 사랑했으며 그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쟁에 휘말려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비극적인 두 남녀는 31년이 지난 오늘 다시 만나 서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비록 지금은 똥배가 나오고 트림도 꺼억 해대지만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

이렇듯 <푸르른 날에>는 진부한 멜로드라마식의 대사를 살짝 비틀어 유쾌한 통속극으로 바꾸어 놓는다. 3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연극 속에 다시 살아난 주인공들도 슬픈데 기쁜 척, 사랑하지만 아닌 척, 힘들지만 담담한 척 거짓말 같이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시종일관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 대사와 19명의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일사불란하고 유쾌한 움직임들은, 5.18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로 관객 앞에 보여준다.

지난 2011년 올해의 연극 Best 3위에 선정되기도 했던 <푸르른 날에>는 지난해에 이른 앵콜공연으로 재공연 무대를 올리게 된 고선웅 연출가는 “신파는 더욱 디테일해질 것이며, 더욱 통속적으로 연출 될 것이다. 초연 때 다소 거칠었던 장면들이 아쉬움으로 남았었다. 올해는 더욱 세심하게 가다듬어질 것이다. 처음에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이 작품이 재공연을 올릴 수 있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완성도 있는 작품을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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