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 치고 가재도 잡으려면…

[파이낸셜투데이=김진아 기자]최근 한화를 시작으로 삼성, SK 등 대기업들이 소매성 자재 구매대행(MRO)사업에서 잇달아 철수하고 있다. 그동안 중소상인들은 자신들이 시장을 공룡 기업들이 진출해 사업기회를 빼앗아가고 있다며 성토해왔다. 이에 정부에서는 대기업들 MRO사업에 대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대중소 동반성장이란 기치를 내걸어 대기업들을 압박해 나갔다. 결국 대기업들은 정부와 여론의 등살에 떠밀려 하나둘씩 MRO시장에서 철수하고 있다. 그러나 실효성이 거의 없는 사업 철수는 보여주기 식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 왼쪽부터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SK그룹 최태원 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LG그룹 구본무 회장


공정위 조사 압박에 울고, 사회적 비판에 한숨만 ‘푹푹’
거래처·사업구도는 그대로…중소상공인 ‘변한게 없다’


지난 1일 삼성이 MRO시장에서 철수를 결정하고 삼성전자 등 9개 계열사가 보유하고 있는 아이마켓코리아(이하 IMK) 지분 58.7%를 매각하기로 했다.

이어 SK도 자회사 MRO코리아를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보다 앞서 한화는 지난 6월 MRO사업에서 철수했다.

대기업들이 하나 둘 MRO사업을 접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LG도 고민하는 눈치다. 대기업들의 MRO사업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정부와 시민단체의 압박이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 ‘대기업 MRO 사업’

몇 해 전부터 MRO시장에 대기업들의 계열사들이 눈에 띄게 덩치를 불려가면서 중소기업들의 반발이 거셌다.

대기업들이 잇따라 MRO 회사를 설립한 후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앞세워 중소업체들의 영역이었던 MRO시장을 저인망식으로 훑어버리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소상공인들은 MRO비상대책위원회를 열고 대기업 MRO가 계열사 영업에만 집중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경비를 줄인다는 원래의 취지를 살리는 것이 기업윤리에 부합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대기업 내부에서 계열사를 통해 물량을 몰아주고 일부 기업의 경우 그룹 오너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점도 비판 여론을 들끓게 했다.

IMK 매출 중 삼성 계열사 물량은 80%이며, LG의 MRO업체인 서브원은 LG계열사 물량이 70%에 이른다. 매출도 서브원의 경우 2008년 1조 5234억원에서 2010년 2조 5314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중소 유통상가들은 대기업이 단가가 100원도 안 되는 나사·클립 조달 시장까지 뛰어들어 계열사 물량 몰아주기로 중소기업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러한 사실이 각종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정부에서도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앞세워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자 결국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 지난 5월 17일 중소상공인 생존권을 위한 MRO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돼 대기업의 중소기업 시장 확대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중소상인들의 반응은 시큰둥, 왜?

그러나 정작 중소상인들은 이 같은 소식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돌아오는 혜택도 없는데 ‘동반 성장’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삼성은 IMK 지분 매각 이유를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 및 상생협력에 부응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으나 중소기업에 실질적 효과를 가져다 줄 지는 미지수란 게 업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그동안 계열 제조업체와 협력업체 사이에 이뤄졌던 직거래 시스템에 이미 대기업 MRO가 끼어든 상태이므로 주인만 바뀔 뿐 달라질 것은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납품업체와 판매처 사이에 대기업 MRO라는 유통단계가 늘어나는 바람에 비용 부담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유통단계가 늘어난 만큼 마진도 늘어나는데 납품가를 유지하기 위해 중소기업들은 납품 단가를 낮출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는 삼성이 IMK의 지분을 매각하더라도 거래관계는 지속되며 심지어 중소 공급업체도 안정적인 판로 확보를 위해 대기업 MRO에 의지하고 있어 ‘이름 바꾸기’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5천억원이 넘는 IMK를 인수할 수 있는 중소기업이 없으며 중소기업중앙회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하는 방안 역시 회원사로 있는 중소기업들 간의 이해상충 문제가 있어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결국 가장 유력한 것은 외국계 기업이 인수하는 것으로 삼성이 매각 주관사를 골드만삭스로 지정한 만큼 설득력 있는 방안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외국계 기업이 인수해 해외 저가 소모품을 쓰게 되면 중소업체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중소기업 동반성장이라는 본래의 매각 취지에 반하게 되는 것이다.

MRO 철수하는 진짜 이유?

그럼에도 대기업들이 MRO 사업에서 잇달아 손을 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정부의 ‘대중소 상생 정책’ 방침에 따르지 않을 경우 사정기관을 통한 기업 옥죄기가 들어올 것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 5월 국무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부처에서 물자 조달 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을 통해서 했으면 한다”며 MRO 문제를 지적하 바 있다.

이어서 임태희 대통령 실장은 “이런 것 하라고 대기업 출자총액제한제를 푼 게 아니다”라고 꼬집었으며 정부에서는 대기업 계열사 간 내부거래 공시의무 대상을 확대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급기야 공정거래위원회 김동수 위원장은 대기업들의 MRO 진출과 관련, “현장 조사를 실시해 법 위반 사항이 있다면 반드시 제재하겠다”며 서슬퍼런 사정기관의 칼날을 들이댔다. 대기업들을 압박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부작용으로 사회적 분위기는 반기업 정서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재계에서는 기업들이 반기업 정서와 정부의 압박을 견뎌내면서 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해 철수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삼성그룹 홍보실 관계자는 <파이낸셜투데이>와의 전화통화에서 “MRO사업 철수는 중소기업에 납품권을 돌려주기 위함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사업 포기를 결정했으니 진행경과를 지켜 봐 달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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