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행적에서 보이는 최순실 악령

▲ 사진=뉴시스
[파이낸셜투데이=김승민 기자] 무능력, 무책임, 조작, 불통, 배신, 독재, 비선. 집권 4년차 박근혜정부를 관통하는 단어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표를 받고 당선됐지만 재임기간 내 역대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시절을 연상시키거나 헌정사상 유례없는 사건, 사고들이 그의 재임기간 내내 터졌다.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았고, 보수 세력과 언론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 임기 후 그의 남은 삶은 자신이 그려온 행적 그대로 되돌려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건들이 그의 청와대 ‘재입성’ 전 생애에 점철돼있으며, 사실상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자연인으로서 본다면 일견 ‘잔혹해’ 보이는 박 대통령의 발자취는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반란은 박 대통령의 신분을 평범한 군인의 딸에서 대통령의 영애로 전격 상승시켰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권력은 헌법 위에 올라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막강했다. 그러는 동안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집으로 여기는 나날을 보냈다. 어머니인 육영수 영부인이 저격으로 세상을 등진 후에는 ‘유신의 퍼스트 레이디’로서 아버지의 통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이 시기 박 대통령은 “꿈에 육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고 전했다”고 주장하는 고(故) 최태민 목사를 만나 그가 죽을 때까지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최순실씨를 알게 됐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박 대통령의 영애로서의 삶은 철옹성 같았던 박정희정권이 심복의 총탄에 무너지면서 급변했다. 박 대통령은 동생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쫓기듯 나와 정치권에 입문하기 전까지 이전과는 다른 18년을 보냈다.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두환씨가 청와대 금고에서 꺼낸 준 6억원과 최태민 일가와의 교류, 육영재단과 영남대학교, 정수장학회 이사장 지위 등이 그의 삶을 뒷받침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박정희정부 시절 조금이라도 권력의 볕을 쬐기 위해 접근하던 무수한 이들이 순식간에 등을 돌린 사실에 충격을 받아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최태민 일가와 재산 문제가 불거지면서 동생들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동생 박근령씨와 박지만씨는 누이가 최 목사와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는 것을 막아달라는 자필 편지를 노태우씨에게 보내기도 했다. 재단 비리가 불거지면서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도 박근령씨에게 넘기게 된다.

박 대통령이가 대중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7년이다. 그는 한나라당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선 이회창 의원을 지지한다는 선언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1년뒤 1998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한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첫 행보를 시작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8대 대통령에 당선된 2012년 12월 19일 서울 광화문 KT사옥 외벽에 이를 알리는 영상이 비춰져 있다. 사진=뉴시스

◆끝내 대통령에 오르다

박 대통령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개인으로는 5선에 성공했으며, 소속 당이나 소위 친박근혜 의원들의 위기 때마다 기사회생의 발판을 마련해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불법 정치자금 전달 사건인 ‘차떼기 사건’과 탄핵 정국으로 위태로웠던 17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정권심판론으로 어려웠던 19대 총선 때 당권을 쥔 박 대통령은 당의 의석을 기대 이상으로 지키거나 단독과반을 확보했다.

물론 몇 번의 위기도 있었다. 17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 자리를 두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결과는 ‘패배’였으며, 18대 총선에서는 친박계 의원들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이때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 대통령의 과거 비리들도 튀어나오게 됐다.

하지만 19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명칭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비상대책위원장에 오른 박 대통령은 이명박계 의원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키고 19대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설욕했다.

역대 대통령 중 최다 득표한 박 대통령은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펼칠 것이란 기대를 받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재임기간 내내 박근혜정부의 정통성과 신뢰도를 뿌리부터 흔드는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오죽하면 김영삼정부의 오명이었던 ‘사고공화국’이 다시 거론될 정도였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2013년 4월 30일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 서울 서초구 서초동 중앙지방검찰청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뒤 차에 오르고 있다. 사진=뉴시스

취임 첫 해 18대 대선에 국가정보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댓글을 단 정황들이 포착됐다. 대검찰청이 ‘국정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으로 불리는 해당 사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국군사이버사령부도 18대 대선 관련 댓글 공작에 참여한 것이 확인됐다.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은 원칙대로 수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조선일보가 혼외자식 의혹을 제기하고 청와대의 압박으로 인해 수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비롯한 해당 사건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국가정보원법, 공직선거법 위반을 다투는 재판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같은해 박근혜정권은 외교적 신뢰 부분에서 치명타를 입기도 했다. 국가 기밀문서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NLL 대화록)이 정쟁에 휘말린 가운데 공개된 것.

사건은 2012년 말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북방한계선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박근혜정부 출범 후 여당의 압박 아래 국정원은 NLL 대화록 전문을 공개했고, 포기 발언은 없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20대 때부터 이어진 최태민 일가와의 인연
유신의 퍼스트레이디에서 정치인으로 변신
세월호, 메르스…다시 불거지는 사고공화국
반복되는 조작·불통·공약파기…쌓여가는 분노

◆보호받지 못하는 국민들

집권 2년차인 2014년은 정부에 대한 신뢰가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 해였다. 박정희정부 시절 ‘인민혁명당 사건’, ‘울릉도 간첩단 조작사건’을 연상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정원이 탈북자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 유오성씨를 북한에 탈북자 정보를 넘긴 간첩으로 지목하고 기소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정권은 그 근거로 유씨의 여동생 진술과 유씨의 중국 출입이 기록된 문서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여동생이 2014년 4월 기자회견을 통해 국정원의 감금·폭행·회유 등을 견디지 못하고 오빠에 대한 거짓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국정원이 제출한 중국 문서들이 위조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대법원은 간첩혐의를 받은 유씨에게 무죄를, 증거조작 혐의를 받은 국정원에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승객 447명과 승무원 24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좌초돼 침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해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정부의 무능력과 도덕적 결함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으로 거론된다. 500명 가깝게 탑승한 배가 가라앉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고 발생 7시간 만에 중앙안전재난대책본부에 모습을 드러낸 박 대통령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든가”라는 발언을 남겼다. 이후에도 정부는 신속한 대응은커녕 우왕좌왕한 모습만 보였다. 온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는 상황에서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충격적인 입장까지 내놓았다.

야권과 여론은 박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 거센 비판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국가안전처를 만들어 모든 유형의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겠다고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특별법 제정에 대해 공감하며, 유가족 마음이 잘 반영되도록 협조하고, 세월호 사건 수사과정이 유가족과 철저하게 공유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해당 약속들은 박근혜정부 4년차가 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2014년 11월 세계일보의 보도로 시작된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주곡이었다. 최씨의 전 남편 정씨가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속칭 ‘문고리 3인방’ 인물들을 통해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이 나돌았고, 해당 의혹의 출처는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한 문건으로 확인됐다. 정부와 검찰은 의혹은 놔둔 채 내부정보들이 유출된 점에만 집중했고, 결론적으로 해당 사건 관계자인 당시 조응천 비서관과 박관천 경정은 기소되고 세계일보사 사장은 사직했으며 최경락 경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근혜정부 3년차 때도 바람 잘 날은 없었다. 전 경남기업 회장이자 한때 새누리당 의원이었던 성완종씨의 자살은 박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과 새누리당 소속 정치 거물들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번졌다. 그러나 해당 사건 역시 일부 정치인만 기소되는 식으로 결론 지어졌다.

전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발병자를 낸 메르스 사태는 박근혜정부가 세월호 이후에도 달라진 점이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밖에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당시 약속했던 해고 요건 강화와는 정반대인 노동정책을 펴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했다. 또 당사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의 협의 없이 일본 정부와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를 하면서 전 국민적 분노를 키웠다. 결국 그해 11~12월 정부의 무능력과 불통을 비판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났다.

▲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정세균 국회의장과 정국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 본관에 들어서자 야당의원들이 손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치솟는 불만, 그래도 마이웨이

집권시기만큼 갈등을 쌓아온 박 대통령은 올해 들어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북한이 4차 핵실험에 성공하자 개성공단 폐쇄라는 초강수를 둔 것. 문제는 개성공단에 입주한 자국 기업에 폐쇄를 예고하지 않아, 기업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정부는 피해 기업을 위한 대책으로 무이자대출을 내놨지만, 공장과 중요 시설을 모두 개성공단에 두고 온 상황에서 이는 동족방뇨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왔다.

이외에 박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무상보육은 중앙정부 대신 교육청이 예산 부담을 떠안으면서 보육대란으로 이어졌고, 숱한 공작 논란으로 신뢰도가 바닥까지 떨어진 국정원에 과도한 권한을 쥐어주는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는 등 국민 불신을 높이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박근혜정권에 대한 국민 불만은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최다 의석을 차지하는 것으로 분명히 드러났지만 박 대통령의 고개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지난해 대규모 집회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뇌사상태에 빠진 고령의 농민에 대한 사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으며, 국민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를 국내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박 대통령의 이같은 통치 잔혹사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정치스캔들로 거론되는 ‘박근혜-최순실게이트’로 화룡점정을 찍게 됐다.

박근혜 잔혹사를 예고한 말말말

정치권에서는 오래전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잔혹사’를 예고한 발언들이 떠돌아다녔다. 발언의 주인공 중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 같은 정치 거물부터 전여옥 전 의원 같은 한때 측근이었던 인물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7년 당시 박근혜 의원을 두고 “칠푼이” 또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거침없이 말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윤여준 전 장관은 18대 대선을 앞두고 “(박 전 위원장이) 당을 운영하는 방식을 보면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해 보이지 않나”며 “말을 보면 의사결정 구조가 투명하지 않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전여옥 전 의원은 “박근혜 위원장은 자기 심기를 요만큼이라고 거스르거나 나쁜 말을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그가 용서하는 사람은 딱 한 명 자기 자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나라당 당원이었던 김해호씨는 2007년 6월 기자회견에서 “최태민의 로열패밀리는 육영재단을 재산증식의 장으로 이용했고 박 전 대표는 육영재단 이사장이었지만 아무런 실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최태민과 그의 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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