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린에서 최순실까지, ‘굽신굽신’ DNA

▲ 고(故) 이병철(오른쪽) 삼성그룹 선대 회장과 그가 1938년에 연 삼성상회. 사진=뉴시스
[파이낸셜투데이=한종해 기자] 이재용 부회장이 등기이사 잉크도 마르기 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암초를 만났다. 2008년 4월 삼성 특검 이후 8년 만에 본사가 털렸고, 이 부회장이 검찰 소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창립 이후 잊을만 하면 ‘정경유착’ 의혹에 휩싸여온 삼성. 삼성의 3대를 되돌아봤다.

삼성의 역사는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이 1938년 삼성상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삼성상회는 만주, 중국에 대구 사과와 포항 건어물을 내다팔아 성공을 거뒀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1948년 서울에 무역업체인 삼성물산공사를 세웠고 몇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제일제당, 제일합섬 등을 성공시키며 사업을 순조롭게 키워나갔다. 그리고 1966년 9월 16일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다.

‘한비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이병철 회장에게 큰 타격을 줬다. 전말은 이러하다.

◆백색 시멘트로 위장한 사카린

이병철 회장은 울산에 한국비료 공장을 지으면서 일본으로부터 상업차관 4200만달러를 얻었다. 지불보증은 정부가 섰다. 일본 미쓰이물산은 차관을 공장 건설용자재와 기계로 대신 제공하면서 리베이트로 100만달러를 삼성에 줬다.

문제는 현금 100만달러를 가져올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삼성은 이 돈으로 사카린 2259포대를 사 백색 시멘트로 위장해 들여왔다. 에어컨‧냉장고‧전화기‧양변기‧욕조 같은 사치품도 함께 밀수했다.

당시 세무국장은 “한국비료의 이일섭 상무와 이창식이 사카린의 원료인 OTSA 2400부대를 건설 자재와 같이 밀수입해 정상 수입품인 것처럼 매각하려다가 부산 세관 감시과에 의해 적발됐다”고 발표했다. 이창식은 이병철 회장의 2남인 이창희씨의 가명이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의 장남 고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1993년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를 통해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정권과 논의해 현금이 아닌 물건을 들여오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이맹희 회장은 회고록에서 “밀수로 들여온 돈 중 3분의 1은 박정희 대통령 쪽에 정치자금으로 주기로 약속까지 다 돼 있었다”며 “그러나 당시 공화당의 실력자인 김모씨가 따로 정치자금을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다”고 주장했다.

이병철 회장도 훗날 ‘호암자전’에서 OTSA는 비료의 원료로 합법적으로 들여온 것이며, 한국비료 주식의 30%를 내놓으라는 ‘정치권의 누군가’의 압력을 거부하자 사건이 터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치권과 경제계가 맺고 있는 부정의 공생관계 즉, 정경유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병철 회장의 차남 이창희씨가 구속됐으며 고 김두한 국회의원의 오물투척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병철 회장은 1967년 10월 22일 사카린 밀수사건의 책임을 치고 한국비료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하고 물러났다.

이병철 회장은 1년 3개월만에 삼성그룹이 위기에 처해 있다며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맹희에게 그룹 일부를 맡겼는데 6개월도 채 못 돼 그룹이 혼란에 빠졌다”고 밝혔다.

‘한비사건’ 정권과 재벌의 은밀한 커넥션
‘삼성X파일’ 당사자 ‘무죄’, 고발자 ‘유죄’
물러났던 병철‧건희 ‘위기’주창하며 복귀 닮은꼴
특검 담당검사 아들 삼성전자 과장에 특채 입사

◆아들로 이어진 ‘위기관리능력’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산업, 석유화학, 건설, 중공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하고 3남인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의 경영권을 물려줬다. 이병철 회장은 1987년 11월 19일 사망했다.

정관계 인사 관리는 이건희 회장 시대에도 만연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불법도청을 한 테이프, 이른바 ‘삼성 엑스파일’이 2005년 7월 세상에 공개된 게 대표적이다.

해당 파일에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그룹 2인자 이학수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대화가 담겨있었다. 삼성이 대선 후보자와 유력 정치인,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던 정황이나 계획 등이 대화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해 8월에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에 의해 삼성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전현직 검찰 최고위 간부 7명의 실명과 녹취록이 공개됐다.

그러나 2015년 12월 서울중앙지검은 횡령과 뇌물공여 혐의로 고발된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 관계자들을 불기소 처분했다. 금품을 받은 것으로 거론됐던 전‧현직 검사나 정치인에 대한 처분도 없었다. 반면, ‘삼성 엑스파일’을 공개한 MBC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이들은 유죄가 확정됐다.

2008년 1월부터 4월까지 이어진 삼성 특검도 용두사미로 끝났다. 삼성 특검은 2007년 11월 삼성법무팀장 출신 김용철 변호사가 자신의 계좌에 삼성그룹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특검팀은 이건희 회장 집무실, 자택, 삼성본관, 용인 에버랜드 인근 미술품 창고, 삼성전자 수원 본사 등을 압수수색했으나 삼성의 조직적 은폐에 부딪히면서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관계자들에게 모두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특검에서 불법행위와 차명재산이 드러나 기소된 이건희 회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5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으나 4개월 뒤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2012년 삼성비자금 사건의 특별검사였던 조준웅 검사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이 특별사면을 받은 직후 삼성에 특채로 입사한 것이 드러나면서 논란을 빚었다. 특검팀 지휘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2차장은 황교안 국무총리다.

◆돈 앞에 버린 국민약속

이건희 회장은 2008년 4월 ‘대국민 사과 및 퇴진 성명’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드린 데 짐심으로 사과드리면서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특검 수사에서 조세 포탈로 문제가 된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 등 차명 재산에 대해서는 실명 전환 후 누락 세금 등을 모두 납부한 뒤 남는 돈을 유익한 일에 쓸 수 있는 방도를 찾기로 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건희 회장 역시 이병철 회장과 마찬가지로 2010년 경영에 복귀하면서 삼성그룹의 위기를 그 이유로 들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삼성에 돌아왔다.

‘대통령 독대’ 총수 7명 소환예고, 잔뜩 웅크린 기업들
볼썽사나운 ‘피해자 코스프레’


검찰이 대통령과 독대한 것으로 알려진 7개 기업 총수들 소환 방침을 밝힘에 따라 기업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돈을 낸 해당 기업들이 대가를 바랐다면 뇌물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르재단이 설립되기 3개월 전인 지난해 7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은 전국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전담 지원하는 대기업 총수 17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가 끝난 뒤 특별히 7개 그룹 총수는 이틀에 걸쳐 박 대통령이 독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이 참석자로 거론된다.

검찰은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다이어리와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에서 이 같은 정황을 확인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8일 “출연금을 낸 대기업 53곳에 대한 전수조사를 하겠다”며 “각 기업들이 어떤 배경 속에 출연금을 냈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필요하다면 총수들도 불러 조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검찰은 지난 7일 박모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와 이모 상무를 조사했고, 8일에는 박모 현대차 부사장 등을 불러 그룹 총수의 대통령 독대 여부와 거액의 출연금을 낸 이유 등을 조사했다.

검찰 조사에서 대기업들의 재단 출연금이 ‘대가성’을 바라고 이뤄진 것이라고 판단되면 해당 그룹 총수는 물론, 박 대통령까지 ‘뇌물’ 혐의로 조사받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독대 당시 7대 그룹은 각각 저마다의 어려운 사정을 겪고 있었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후계구도 재편 과정에 있었고, 최태원 회장과 이재현 회장, 김승연 회장은 광복절 특별사면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 중 김 회장은 지난해와 올해 사면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최 회장은 지난해 광복절 사면으로, 이 회장은 올해 광복절 사면으로 각각 자유의 몸이 됐다.

검찰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독대 여부도 비중있게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한겨레는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지난 7일 안 전 수석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지난 2월 말~3월초쯤 신동빈 회장을 독대한 정황을 확보해 수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신 회장은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검찰 내사를 받고 있었다. ‘강제성’ 혹은 ‘대가성’ 만남이 아니었겠느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롯데 측은 이같은 보도에 대해 “신 회장은 올해 2월말부터 3월초까지 일본과 싱가포르 출장 중이었다”며 “그 외 기간의 면담 일정에 대해선 확인되지 않으며 검찰 수사를 통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부영그룹도 도마에 올랐다. 한겨레가 지난 2일 공개한 K스포츠재단의 회의록 자료 등을 보면 지난 2월 26일 안 전 수석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회의실에서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과 김모 사장을 만났다. 회의록에는 안 전 수석과 함께 온 정현식 전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이 “부영에서 5대 거점지역(체육인재 육성 사업) 중 우선 1개(하남) 거점 시설 건립과 운영에 대해 지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이에 이 회장이 “최선을 다해 도울 수 있도록 하겠다”며 “다만 현재 저희가 다소 부당한 세무조사를 받게 됐다. 이 부분을 도와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부영은 해외 법인을 통한 이 회장 일가의 탈세 의혹과 관련해 세무조사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회의 내용이 최순실씨에게 보고된 뒤 ‘조건을 붙인다면 놔두라’는 최씨 지시로 거래는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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