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파이낸셜투데이=이한듬 기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마음에 때 아닌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또 다시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인 외국계 기업 쉰들러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을 추가적으로 확보하면서 경영권 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 회사는 앞서 지난해에도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지분을 꾸준히 늘리면서 경영권 분쟁 논란을 불러온 바 있다. 하지만 당시 현대 측은 쉰들러그룹과 우호적 관계임을 강조하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현대엘리베이터가 그룹 내 주력 계열사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목적의 파생상품 계약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 쉰들러그룹과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현대그룹과 쉰들러그룹간의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정씨적통론’을 고수하며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범현대가로부터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던 현 회장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기게 됐다.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현대그룹 지주회사 현대엘리베이터 2대주주 쉰들러그룹,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확대
경영권 분쟁 가능성 대두…끊임없이 불거지는 경영권 분쟁 의혹에 난감한 현 회장

현대엘리베이터 2대 주주인 쉰들러그룹은 지난 8월 17일 현대엘리베이터 보통주 12만6,084주를 장내매수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쉰들러그룹의 보유지분은 기존 33.34%에서 34.51%로 1.17%포인트 증가했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업계에서는 쉰들러그룹이 단순한 투자가 아닌, 사실상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 참여를 목적으로 지분을 추가 매입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쉰들러그룹이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목적의 파생상품 계약으로 1,000억원대 손실을 입자 크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갈등의 불씨 된 파생상품

앞서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 2006년 넥스젠, 케이프포춘 등의 투자회사가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을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주가가 떨어지면 그 손실의 100%를, 주가가 오르면 이익의 80%를 현대엘리베이터가 담당하는 내용의 파생상품 계약을 맺었다. 이후 지난해 말에도 NH증권 및 대신증권과 각각 비슷한 내용의 파생상품 계약을 맺었다.

이는 현정은 회장이 ‘정씨적통론’을 고수하는 범(凡)현대가의 공격으로부터 그룹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현대그룹은 각 계열사들의 지분이 유기적으로 연관돼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따라서 주요 계열사들의 지분을 지키지 못하면 현 회장의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유로 위험 부담이 큰 파생상품 계약을 맺었으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 8월 1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을 통해 약 481억원 규모의 파생거래 손실을 입었다고 공시했다. 올 초 4만원대 수준이었던 현대상선의 주가가 최근 2만원대로 떨어진 까닭이다.

앞서 지난 1분기에 기록한 607억원 규모의 파생손실까지 합하면, 현대엘리베이터는 상반기 파생계약 거래에서만 무려 1,088억원의 손실을 입은 셈이다. 이는 지난해 영업이익 465억원에 2배 이상 해당하는 규모다.

쉰들러그룹 반발…우호적 관계에 금?

현대엘리베이터의 손실이 커지자 2대 주주인 쉰들러그룹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쉰들러그룹은 앞서 8월 16일 현대엘리베이터의 파생상품 손실과 관련해 현대그룹에 회계장부를 공개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쉰들러그룹의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주 입장에서 거래내역과 조건공개를 요구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외부로 노출된 것을 두고 양측 간의 갈등이 커진 까닭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진 직후 곧바로 쉰들러그룹이 현대엘리베이터의 보유지분을 늘리자 업계에서는 현대그룹의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쉰들러그룹은 앞서 지난해에도 공격적으로 현대그룹의 지분을 확대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현대그룹측은 쉰들러그룹과 우호적인 관계임을 강조하며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번에도 현대그룹은 경영권 분쟁 가능성에 선을 긋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파이낸셜투데이>와의 전화통화에서 “우리측이 가진 지분이 50%가 넘기 때문에 쉰들러그룹이 지분을 확대했다 하더라도 경영권 분쟁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쉰들러그룹이 2대 주주의 위치를 앞세워 향후 주주총회시 사외이사 선임을 요구하는 식으로 경영권에 참여하지 않겠냐는 전망도 나온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경영권 분쟁’, 속쓰린 현 회장

현대그룹의 판단대로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됐든 현 회장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울리만은 없는 상황이다. 잊을만하면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터져 나와 현 회장의 속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 회장은 지난 2003년 작고한 남편 고(故) 정몽헌 회장을 대신해 그룹의 수장으로서 현대그룹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현 회장의 행보는 모진 가시밭길이었다. 창업주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이 “현대그룹은 정씨가 이끌어야 한다”는 ‘정씨적통론’을 내세우며 현 회장의 경영권을 호시탐탐 노려왔기 때문.

2003년 일어난 ‘시숙부의 난’과 2006년 발생했던 ‘시동생의 난’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에도 현 회장은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시숙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적통성’을 둘러싼 한판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인수전은 결국 현 회장의 패배로 끝났고, 올 초 추진했던 현대상선 우선주 확대 발행마저 현대중공업 등 범현대가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경영권 방어에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호관계였던 2대주주 마저 분란의 단초를 제공한다면 현 회장으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래저래 현 회장의 마음이 심란해져만 가는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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