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

금융은 상호 신뢰와 믿음을 먹고 사는 유기체다. 금융사와 고객 상호간 믿음이 있어야 금융산업이 원활하게 유지되고 영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뢰와 믿음은 금융산업의 바탕이고 버팀목이다. 보험도 마찬가지다. 보험사와 보험가입자의 신뢰와 믿음이 있어야 보험산업이 원활히 유지되고 지속 가능하다.

보험은 위험 보장을 위해 가입자들이 보험료를 갹출해서 공동기금을 만들어 운영하는 상부상조의 제도다. 그러므로 돈 내는 보험계약자가 보험의 주인이고 보험사는 머슴인 셈이다. 긴 말 필요 없이 보험사가 누구 덕분에 밥 먹고 사는지 자문해 보면 답은 명확해 진다.

그런데 어떤 보험사도 ‘보험의 주인은 보험계약자이고 보험사는 머슴’이란 사실을 제대로 교육시키거나 알려주고 이를 올바로 실천하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많은 보험사들이 주인을 외면한 채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해 임직원들에게 목표를 부여, 달성하도록 독려하는데, 누가 봐도 주객(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크게 잘못됐다.

‘영업 윤리’란 “고객의 이익과 보험사 이익이 충돌할 경우 고객의 이익을 우선하여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을 뜻한다. 보험의 주인은 보험계약자이므로 머슴인 보험사(GA, 보험설계사 포함)들은 주인을 위해 일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영업 윤리’를 준수하고 실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보험사들이 주인을 위해 기본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행동 강령인 것이다.

그런데 보험사들에게 ‘영업 윤리’가 있는지 의문이고, 있더라도 현장에서 실제로 얼마나 준수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일부 보험사는 핵심가치나 비전 등에 영업 윤리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거나 준법윤리서약 등을 통해서 조직원과 공유, 발표한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실행하지 않으므로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영업 윤리’가 없거나 있더라도 해당 내용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보험사들은 고객의 이익과 보험사 이익이 충돌할 경우 보험사 이익을 우선하여 결정, 실행해 왔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회사에 충성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윤리가 밥 먹여주나?”라고 냉소하며 회피하거나, 아니면 알더라도 회사의 이익(판매실적) 달성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외면하였다. 보험사들에게는 주인 보다 주주 이익이 더 중요하고 발 등에 떨어진 실적 달성이 우선이므로 애써 회피해 온 것이다. 그 결과 ‘영업 윤리’는 보험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액자 속의 빛 바랜 문구로 전락되어 관심과 뇌리에서 이미 사라져 버렸다.

보험사들은 입만 열면 ‘고객 중심’, ‘고객 만족’, ‘소비자 보호’를 외쳐 왔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달라진 것, 소비자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것이 별로 없다. 말로만 외쳐 왔고 실제 행동은 하지 않았거나 정반대로 해 왔기 때문이다. ‘영업 윤리’는 고사하고 얄팍한 상술로 소비자를 현혹, 기만하는 행태가 갈수록 늘고 있으므로 보험가입자들의 피해는 줄지 않는다. 보험사들의 민 낯이고 언행 불일치, 이중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보험의 위기를 알리는 징후는 차고 넘친다. 금융 민원 중 보험민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그 사례이고 명백한 증거다. 보험 민원은 정도와 숫자의 차이만 있을 뿐, 매년 꼴찌(2019년은 금융민원 중 62.3%가 보험 민원이었음)로 변함이 없다. 생명보험은 민원 중 불완전판매가 46.0%로 가장 많고, 손해보험은 보험금 산정·지급 관련 민원이 43.1%로 가장 많다. 생·손보 할 것 없이 고객의 이익 보다 보험사 이익을 우선한 것이고 영업 윤리를 위반해서 벌어진 일들이다.

더구나 소비자에게 최적의 맞춤형 상품을 가입시키겠다며 2005년에 도입한 GA(법인보험대리점)는 목적이 실종된 채 이전투구의 돈벌이 장으로 전락되었고, GA 관리감독이 방치된 사이 각종 불법과 폐해가 난무하여 소비자 피해가 속출해 왔다. GA에게 적합성의 원칙(소비자의 연령, 재산상황, 계약체결 목적 등을 파악한 뒤 상품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상품 가입을 권유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은 없고 있더라도 무시된 채 허위·과장으로 상품 판매가 진행되었고 원칙을 위반하더라도 처벌받은 자가 드물다.

‘영업 윤리’는 말 보다 실천이 중요한데 온데 간 데 없다. 보험사들은 보험의 본질이 무엇이고 보험사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며 주인을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 채 돈벌이와 실적 달성에만 목매달하여 보험이 길을 잃어 괴물로 전락되었고 보험 민원이 가장 많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보험사들은 물론이고 금감원, 금융위 조차도 현안 1순위 과업인 보험 민원 근절을 위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근본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마땅한데,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다. 보험 민원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였거나, 아니면 보험 민원 근절을 위한 의지가 없거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경제규모 확대에 따라 보험시장의 수요는 계속 증가하였고 소비자들의 보장 욕구도 갈수록 커졌지만, 돈 내는 주인은 홀대 당한 채 언제나 찬밥 신세였고 보험사 먹여 살리는 들러리로 전락되어 왔다. 보험업계에 돈벌이와 실적 경쟁이 최우선이라는 영업논리가 지배하였고, ‘영업윤리’가 없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정부도 ‘소비자 보호’를 매번 외쳐 왔지만 주인을 홀대한 채 보험사 중심으로 정책을 시행해 왔다. ‘보험산업 경쟁력 강화 로드맵(2015.10.16)’이 대표적 사례다. 속내는 보험상품과 보험료를 자유화해서 보험사를 살려주는 정책인데, 금융위는 “사전규제 → 사후감독으로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경쟁과 혁신을 통해 소비자 편익이 제고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하였다. 금융위 관료들이 보험업계와 사전 결탁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시행 후 5년 이상 경과되었지만 소비자 편익이 제고된 것은 뚜렷이 없고, 갈수록 보험료 인상과 소비자 현혹하는 미사여구 상품들만 증가하며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업 윤리’는 보험사들이 당연히 숙지하고 실행해야 하는 덕목이고 행동 강령인데, 우리나라 보험업계에는 이 개념이 당초부터 없었고 이를 의무적으로 준수하도록 정부가 유도하였거나 가르친 적도 없다. 보험사들도 자발적으로 ‘영업 윤리’를 공론화하거나 실행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므로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보험사, 철학 있는 보험사와 보험인을 찾아볼 수 없다.

필자는 금융소비자원에서 보험소비자 피해 구제 상담을 하고 있는데, 그 때마다 속이 상하고 화가 난다. 보험사들이 영업 윤리를 망각한 채 돈벌이를 위해 보험을 팔았고 계약 유지·관리를 소홀히 해서 보험가입자 대부분이 중도 탈락으로 원금 손실은 물론 보험의 효용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계약 중심으로 수수료를 지급하고 초년도에 선지급하는 보험설계사 수수료규정 때문인데, 이로 인해 현장에서 온갖 부작용과 폐해들이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소비자 보호는 항상 뒷전이었다. 당초부터 보험사들의 잘못이었고 정부가 보험사를 올바로 이끌지 못한 결과다.

지속 가능한 보험사가 되려면 신뢰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법 보다 예절·규범이 우선이고 ‘영업 윤리’가 필요하다. 주식회사라 하더라도 예외일 수 없다. 올바른 보험사라면 주인에 대한 도리(道理)와 염치(廉恥)가 있어야 한다. 도리와 염치는 ‘영업 윤리’와 일맥 상통하는 말이다. 법규에 없으니 해도 된다는 것은 하등동물이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인간이 할 말이 아니다.

최근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금융사의 화두로 떠 오르고 있지만, 보험업계는 ESG보다 ‘영업 윤리’가 더 조속하고 절실히 필요하다. ‘영업 윤리’는 보험사의 존재이유를 각성하고 확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업 윤리’를 모르거나 알더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주인을 위해 일하는 보험사가 아니다. 또한 보험사들의 왜곡되고 잘못된 행태로 선량한 보험가입자들이 부당하게 피해 보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꼴찌로 전락된 보험 민원을 일부라도 줄여야 하는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금융회사에 대해 엄격한 윤리, 예절과 규범을 요구하고 있고 이를 강력 실행하고 있다. 각종 금융관련 자격증 시험에서도 윤리과목이 필수이고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금융회사 어디에도 영업 윤리가 보이지 않고 이를 강조한 자도 없으며, 영업 윤리를 실천하자고 주장한 자도 없다. 금융관련 자격시험 어디에도 윤리과목이 필수로 포함된 경우는 없다.

늦었지만, 당초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각성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 보험사들에게 소비자는 정성으로 모셔야 하는 주인이지 돈벌이 수단이나 대상이 아니다. 주인을 외면한 채 주주 이익을 앞세워 허위·과장으로 광고하고 사업비(판매수수료) 많은 상품을 속여 팔도록 교육하고 비싼 보험료로 바가지 씌우는 보험사는 보험사가 아니므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보험계약자가 낸 보험료로 월급을 받거나 판매수수료를 받는 GA 또는 보험설계사라면 ‘영업 윤리’를 숙지, 실행해서 주인을 위해 일해야 한다. 보험사들은 ‘영업 윤리’를 조직원들에게 반복 교육하고 조치해서 현장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 그래야 주인에 대한 보험사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계약자가 낸 보험료로 월급(판매수수료)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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