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

우리 속담에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쓰지 말고, 오이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 는 말이 있다. “남의 의심 받을 행동을 아예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험사들은 의심 받을 행동을 자제하는 게 아니라 대 놓고 하고 있으니 황당하다. 이것도 모자라 궁색한 변명을 애써 반복하고 있는데, ‘자기(셀프) 손해사정’이 그것이다. 당초 도입 목적과 달리 왜곡되어 불공정하게 운영되다 보니 많은 소비자들이 억울하게 피해를 보고 있다.

자동차사고, 화재와 같이 보험사고가 발생하면 손해액과 보험금을 사정(평가)해야 하는데, 이를 ‘손해사정’이라 하고, 손해사정을 업(業)으로 하는 전문자격인을 ‘손해사정사’라고 한다.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하기 전에 서류 심사만으로 지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손해 사정사에게 손해사정 업무를 맡겨 처리한다. 손해사정사의 업무는 보험업법 제188조에 ‘손해 발생 사실의 확인, 보험약관 및 관계법규 적용의 적정성 판단, 손해액 및 보험금의 사정’으로 정해져 있다.

손해사정사는 3가지가 있는데, ① 고용손해사정사는 보험사 직원으로 고용된 손해사정사로, 승진 하거나 성과급을 더 받으려면 회사에 충성해야 한다. ② 위탁손해사정사는 보험사가 100% 출자한 자회사(손해사정업체)에 소속된 자로, 손해사정 실적(성과)에 따라 모회사(보험사)로부터 수수료를 받는다. ③ 독립손해사정사는 손해사정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자로, 보험가입자의 요청에 따라 일하는 경우가 많다. 손해사정사는 약 1만명 정도로, 고용·위탁 손해사정사가 전체의 83%를 차지하고, 독립 손해사정사는 17%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해사정은 보험금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산정하는 것이 핵심이고 본질이므로 손해사정사의 독립성 확보는 당연한 것이다. 손해사정사는 보험금을 공정하게 산정해야 하므로 보험업법 제189조에 “손해 사정 업무를 수행할 때 보험계약자, 그 밖의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있는 손해사정사는 공정성과 독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으므로 당초부터 배제되어야 하는데, 이를 ‘자기손해사정 금지의 원칙’이라 한다. 법원이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 사건과 이해관계가 있는 법관을 재판에서 제척(기피·회피)하는 제도를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공정한 손해사정을 위해 도입(1977년)된 손해사정사제도가 40년 이상 지났지만 ‘자기손해사정 금지의 원칙’이 무시된 채 거꾸로 가고 있어 소비자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손해사정사 대부분이 고용·위탁손해사정사이고 이들을 부리는 곳이 보험사이므로 제도가 보험사 편향으로 진행되어 왔고 이를 당국이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약자인 보험가입자들은 알게 모르게 보험금을 떼이거나 삭감 당하는 불이익을 받아 왔고, 보험사와 소비자 간 관련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해 손보사 민원 중 보험금 산정·지급 관련 민원이 43.1%로 가장 많고, 생보사는 19.6%로 2위 차지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자기 손해사정’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이런 일이 벌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금융위가 ‘자기손해사정 금지의 원칙’을 외면한 채 보험업법 시행령 제99조(손해사정사 등의 의무) ③항 3호에 독소조항을 넣어 보험사가 손해사정업을 하는 자회사를 두고 위탁하는 형태를 예외적으로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보험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자회사에 손해사정 업무를 위탁해서 보험사 의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보험사들 대부분이 사정업무를 수의계약으로 자회사에 몰아주고 있는데, 보험금을 덜 주거나 안 줄수록 자회사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자회사들은 보험사 의도대로 소비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험금을 부당하게 거절, 삭감하는 등 보험사의 용병(傭兵)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부는 업무와 무관한 정보까지 소비자에게 과다 요구해서 이를 빌미로 손해사정 지연이라며 보험금 지급을 미루거나 보험금 삭감 지급을 조건으로 제시하여 합의서(화해신청서) 작성을 강요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보험사들이 자회사를 통해 보험금을 부당하게 거절, 삭감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자기(셀프) 손해사정을 하는 것이므로 불공정한 거래인데, 보험사들은 한 목소리로 “객관성과 공정성을 모두 지키고 있고, 자회사라도 보험사에만 유리하게 손해사정을 하는 게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 없이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현장에서 보험사들의 자기 손해사정 횡포와 ‘갑질’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험금 1억 깎고 해약시키면 성과급 120만원” 이란 제호로 방송(2015.3.17) 되었는데, “A보험사는 자회사에게 성과급을 주며 해약이나 보험금 삭감을 독려해 왔다. 즉, 보험 계약자로부터 해지동의서를 받아오면 10만원을 주고, 해지동의서를 받아오고 보험금 1억원을 줄이면 기본수수료 포함 120만원을 성과급으로 준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자회사에게 보험금을 떼 먹도록 보험사가 시킨 것이다.

최근에 “B손보 OO자회사, ‘보험금 덜 준 직원에 좋은 평가 줬다”가 보도(2020.2.18)되었는데, B손보 자회사 ‘B CSI손해사정’은 2018년 8월부터 2019년 6월까지 43건의 보험금 청구에서 손해액을 부당하게 적게 산정하고 보험금 지급을 요건으로 합의서를 작성하거나 합의를 요구한 것이 적발되어 금감원으로 부터 중징계(기관경고)를 받았다. 또한 소비자 권익을 침해할 수 있는 요소를 KPI(성과평가지표)에 반영하였는데, B손보사의 다른 손해사정 자회사도 보험금 삭감액을 KPI항목으로 적용해서 금감원으로 부터 개선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B손보사는 별도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보험사 ‘자기 손해사정’의 횡포와 ‘갑질’이 특정 보험사나 손해사정업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 고, 많은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일하는 금융소비자원에도 “손해사정업체(직원)로부터 합의서를 작성하도록 겁박을 받아 보험금을 떼일 처지”라는 사례가 종종 접수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대형사·소형사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발생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 일부 보험사는 “자회사에 일감을 맡겨야 전문성이 강화되고 효율성이 제고되어 소비자 권익이 침해되지 않으며, 규모가 영세한 독립손해 사정업체에 위탁하면 질병이나 사고 등 민감한 정보가 외부에 유출될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당한 주장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 ‘전문성과 효율성’은 자회사에 계속 위탁해서 보험금 을 깎으려는 속셈이고 그 결과 소비자 권익이 침해되며, 정보 유출 우려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것으로 본질을 흐리기 위해 물타기 하는 주장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손해 사정업체의 규모가 영세해 진 것은 보험사들의 자회사 일감 몰아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쳐도 모자랄 판에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으니 계약자가 내는 보험료로 월급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들고 보험사의 존재 이유(보험금 지급 의무)를 망각한 것으로 보인다.

보험사들의 ‘자기 손해사정’이 손해사정의 원칙과 본질을 크게 왜곡, 훼손하여 보험사 주장과 달리 현장에서 많은 소비자들의 불만과 피해가 속출하고 있으므로 “자기 손해사정을 금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오래 전부터 계속되었다. 그러나 보험사들과 금융위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2015년에 국회 입법조사처가 “왜곡된 손해 사정제도를 개선하려면 보험사의 손해사정사 직접 고용과 업무위탁을 제한해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보험사의 후속 조치는 없었다. ② 2017년 국정감사 에서 정무위 의원들이 자기손해사정제 폐지를 요구했지만, 당시 금융위원장은 “손해사정을 통해 보험금 지급규모를 정하는 것이 보험사 고유의 업무이고 손해사정사 선임과정에서 소비자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며 보험사 편향으로 답했다. 보험사들이 미리 써 준 내용을 금융위원장이 답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손해사정사제도의 목적과 취지를 제대로 알고 한 답변인지 의문이다. ③ 2018년 1월에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정한 보험금 산정을 위한 자기손해사정 금지 입법’을 권고하는 공문을 보험사와 금융위에 보냈는데, 보험사들은 꿈쩍하지 않았고 금융위는 ‘수정 수용으로 처리했다’는데, 후속 조치는 없었다. ④ 2019년 국감에서도 일부 의원이 “자기손해사정 비율이 과도하다. 금융위가 시행령을 통해서 자기손해 사정을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금융위는 “자회사 위탁은 손해사정 업무의 효율성 전문성 제고에 대한 것으로 과도하게 제한하면 보험사 비용 증가에 따라 소비자 피해가 증가한다. 세부적으로 살펴보고 개선할 방안이 있으면 개선하겠다”고 답했다. 그 후 조치는 없다.

현행 손해사정 자회사는 누가 봐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사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매출 자체가 모회사(보험사)에서 나오고, 보험금을 덜 지급할수록 후한 평가를 받아 수수료를 더 받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험사의 영향력에 휘둘려 현장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입자의 보험금을 삭감·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무도 부정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

자기 손해사정을 고집하는 보험사와 금융위에 대하여 실망이고 유감이다.

손해사정사제도는 공정한 손해사정을 통해서 소비자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 것인데, 부끄럼 모르고 넉살 좋게 ‘보험사 고유의 업무’니 ‘손해사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이니 ‘정보유출 우려’를 운운하는 것은 본질을 크게 왜곡한 것이고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보험은 보험사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가입자를 위한 상호부조의 제도이므로 보험사는 계약자 자산의 선량한 관리자로 보험금을 정당하게 지급해야 한다. 보험금을 부당하게 거절하거나 삭감하는 것은 계약 위반이고 의무 위반이며 보험사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자기 손해사정인가? 자기 손해사정은 ‘소비자 보호’를 역행하는 것이므로 이유를 불문하고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다.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부당하게 소비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회사를 통해 보험금을 부당하게 편취하거나 편취하도록 시키는 것은 사기이고 범죄이며, 이를 행한 조직은 ‘범죄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소비자 보호’를 솔선수범해야 할 금융위가 보험사에게 ‘자기 손해사정’을 허용하고 고집하는 것은 ‘소비자 억압’이라고 판단된다.

안전을 위해 음주운전을 금지하듯이, 소비자 보호를 위해 보험사의 ‘자기 손해사정’을 금지 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기본이다. 그러므로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대놓고 ‘갑질’하며 소비자의 보험금을 부당하게 뺏지 말아야 한다.

긴 말이 필요 없다. 금융위가 소비자 보호를 위해 당장 해야 할 일은 ① 보험업법 제189조에 ‘자기 손해사정 금지의 원칙’을 명문화하고 ② 독소조항인 동법 시행령의 예외 조항을 삭제하며 ③ 법원의 ‘제척제도’처럼 손해사정 업무를 자회사가 아닌 제3자에게 위탁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다만, 제도를 갑자기 변경하면 부작용이 우려되므로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사전 예고를 통해 단계별로 추진하되, 손해사정 위탁계약서를 전수조사해서 소비자에게 불리 한 조항(KPI)을 삭제 조치하고, 제3자 손해사정업체가 공정하게 사정하는지 상시 모니터링해야 한다. 보험금을 부당하게 거절, 삭감하면 고액의 과태료, 영업 정지는 물론 실형(징역형)을 살게 해야 한다. 특히,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보험사에게 책임을 엄하게 물어야 한다. 처벌 법규가 있는데도 적발하지 않고 적발하더라도 금융위가 처벌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자회사에 대한 업무 위탁이 보험사의 책임 회피용 수단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하고, 약관과 상품안내 장에 손해사정사제도 이용 안내를 기재하고 소비자에게 설명하는 것도 의무화해야 한다.

이런 지적과 제안에도 보험사와 금융위가 ‘자기손해사정 금지의 원칙’을 외면하고 ‘자기 손해 사정 금지’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소비자 보호’를 외칠 자격이 없고 더 이상 존재할 이유도 없다. 보험사가 누구 덕분에 밥 먹고 사는지 안다면 ‘고객 자산의 불량한 관리자’가 되지 말아야 하고, 금융위가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소비자를 위해 일하는 금융위, 주인을 위해 일하는 보험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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