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 1편-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 1편-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
  • 김영권 기자
  • 승인 2018.03.3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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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구형왕릉이 아닌 구형왕릉으로... 릉명(陵名) 변경이 절실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사진=파이낸셜투데이 DB

가야국의 10대왕인 구형왕(仇衡王)은 서기 521년에 즉위했다. 이때는 신라의 강도들이 침범하여 해마다 편안한 날이 없었다. 구형왕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을 기르는 국토 때문에 국민 해치기를 원하지도 아니하고, 또 차마 종사(宗社)가 나에게서 상실되게 할 수도 없다”라며 왕제(王弟) 구해에게 양위(讓位)를 하고, 태자(太子)에게 비빈(妃嬪)을 거느리고 지품펀(현 산청군)의 태왕궁에 은둔했다. 옥전의 위에 인사(仁祀)를 창건하여 시조를 추원하며 제사롤 모시는 장소로 삼았다. 재위는 12년이고, 4년이 지난 병진(丙辰:서기 536)년에 승하하여 석릉에 장례했다.<산청현 왕산 아래 경좌(庚坐)> -가락국기 및 승선전비문 인용-

경남 산청군 금서면에 위치한 가야국 제 10대왕인 구형왕의 왕릉은 국가사적 제 214호로, 외형은 피라밋을 연상시킨다. 일반 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 중턱에 계단식으로 축조된 왕릉은 높이 7m15cm에 달한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에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그 앞에는 석물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구형왕은 “나라도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힐까.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살아남은 군졸들이 시신을 매장하고 잡석을 하나씩 포개 얹었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왕릉은 사료의 뒷받침이 부족해 구형왕릉이라 확정받지 못하고 전(傳) 구형왕릉이라 불린다.

금관가야의 탄생과 번성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삼국구도가 완전히 정립되기 전 이들 고대사의 주역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발전하던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상도 서부지역에는 ‘가야’(伽倻)가 있었다. 가야는 기원전·후부터 562년까지 존재했다. 가야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했다. 변한 12국에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현 경남 밀양), 접도국(接塗國·현 경남 마산 합포),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현 경남 고성군),고순시국(古淳是國·현 경남 진주), 반로국(半路國·현 경남 산청), 악노국(樂奴國·현 경북 고령), 군미국(軍彌國·현 경남 곤양),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현 경북 고령), 감로국(甘路國·현 경북 김천), 구야국(狗倻國·현 경남 김해), 주조마국(走漕馬國·현 경북 김천 조마면),안야국(安邪國·경남 함안),독로국(瀆盧國·부산 동래)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현 경남 함안), 고령가야(高寧伽耶·현 경북 함창), 대가야(大伽耶·현 경북 고령), 성산가야(星山伽耶·현 경북 성주), 소가야(小伽耶·현 경남 고성), 금관가야(金官伽耶·현 경남 김해), 비화가야(非火伽耶·현 경남 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며, <일본서기>에도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탁순(卓淳)·탁기탄(喙己呑) 등이 나온다. 특히 <삼국유사>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구도가 완전히 정립되기 전 이들 고대사의 주역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발전하던 또다른 세력이 있었다.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상도 서부지역에는 가야가 있었다. 사진=Daum백과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구도가 완전히 정립되기 전 이들 고대사의 주역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발전하던 또다른 세력이 있었다.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상도 서부지역에는 가야가 있었다. 사진=Daum백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가야 9간(干)이 추장이 되어 각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

이에 하늘로부터 보랏빛 줄이 내려와서 보니 붉은 보자기 안의 금합에 6개의 황금알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아도간이 이를 집으로 가져 간지 12시간 만에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알이 어린아이로 변했는데, 그 중 먼저 태어난 이가 수로(首露)였다. 그는 곧바로 금관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나머지 다섯 아이는 각각 5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설화는 아홉간으로 대표되는 김해지역의 토착세력과 수로집단이 연합하여 금관가야국(변한 12국 가운데 구야국)을 건국한 사실과 이후 그 국가를 중심으로 가야연맹체를 결성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지역은 일찍부터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를 비롯한 한예(韓濊)와 중국 군현세력들이 이곳에서 철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해 중국의 군현 및 왜 등과 경상도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금관가야는 중국 군현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이를 경상도 내륙의 여러 국가와 왜 등에 공급해 중계무역의 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금관가여는 이를 기반으로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관가야의 쇠락

번성을 이루던 금관가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경자대원정’ 이후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왜·가야 세력과 동맹을 맺고 신라는 이에 맞서고자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다. 400년 왜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신라국경에 집결한 왜군을 격파한 후 가야의 종발성(從拔城·현 부산 진구로 추정)까지 진격했다.

이 사건 등으로 인해 한반도의 정세는 급변하게 된다. 고구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백제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해 경쟁구도에서 뒤처지게 된다. 신라의 고구려의 간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지만 고구려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고 문화 전파의 계기가 되었기에 이를 통해 자신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러나 가야제국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금관가야는 쉽게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된다. 반면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후기 가야연맹체를 주도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보더라도 쉽게 할 수 있다. 금관가야의 유적지들을 살펴보면 5세기 전까지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을 중심으로 왕과 귀족 등 지배층의 묘가 조성되며, 번성했던 당대 문화들을 반영하는 유물들도 출토된다.

하지만 5세기 후반부터는 대형 고분군의 축조가 단절됐으며 김해 능동 고분군이나 덕정고분군, 두곡고분군, 예안리고분군 등 축소된 모습의 고분군이 나타난다. 이러한 정황들은 ‘가락국기’와 같은 사실기록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구전설화인 ‘황세와 여의’에 의하면 이 당시 신라와 잦은 전쟁을 했다고 한다. 이 설화의 배경은 금관가야의 아홉 번째 왕인 겸지왕 때로, 그는 구형왕의 아버지다. 황세는 이 당시 활약했던 것을 나온다. 그러나 황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달처럼 기우는 금관가야의 운명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역사로 남은 금관가야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의 기록을 보면 구형왕과 세 아들이 금관가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법흥왕은 이를 기뻐하며 그에 맞춰 예를 갖추었고, 금관가야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오랜 세월 정설로 받아들여져 금관가야가 군사적 충돌 없이 신라에 항복한 것으로 알아왔다.

하지만 <가락국기>에서는 이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 제 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들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 맞서 싸울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구형왕이 당시 군사들을 이끌고 신라 법흥왕의 군대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금관가야와 신라의 국력차이는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신라는 이미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힘을 떨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그 첫 대상국으로 금관가야를 선정한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광개토대왕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금관가야로서는 이러한 신라에 섣불리 대응하기에는 국력이 미력했던 것이다.

김수로왕이 세운 나라이자 지난날 전기가야연맹체의 맹주라는 이름은 한낱 과거의 영광에 불과했고, 맹주의 지위는 이미 대가야로 넘어 간지 오래였다. 따라서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ㄱ신라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멸망을 준비한 것이다. 구형왕은 동생인 탈지이질금을 보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해 신라에 들어간다.

탈지이질금을 일부에서는 대가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탈지이질금을 본국에 남겨 가야제국들의 연합군으로 멸망으로 막으려 했으나 이마저도 생각처럼 풀리지 않자 스스로의 영토를 지키려는데 더 중점을 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동맹국까지 모두 자신들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금관가야의 구형왕과 그의 가족들은 항복을 위한 준비를 했을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당시 항복의례가 어떠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구형왕과 가족들, 신하들은 당시 항복 의례에 맞춰 준비했을 것이다.

신라로서는 크게 싸우지 않고 금관가야를 복속시켰던 것이다. 금관가야가 멸망한 당시 세력은 동맹국인 대가야나 아라가야에 비해 아주 미약했다. 따라서 금관가야의 합병으로 신라가 얻는 이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명분상으로는 최고의 수확을 거뒀다.

가야제국을 대표하던 금관가야의 항복은 당시 기타 소국(小國)에도 알려졌을 것이며, 신라의 강성함을 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신라는 금관가야의 후손들에게 특별대우를 해줬다. 구형왕이 항복하자 법흥왕은 예를 갖췄고, 금관가야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다.

또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자인 김무력도 가야땅을 벗어나 당시 최전선이었던 한강유역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것은 김무력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기회를 줌과 동시에 고향에서 멀리 떨려 냄으로서 김해 토착세력과의 연계를 느슨하게 하려는 이유였던 것이다. 이로서 500년에 이르는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 조성된 구산동고분군에서는 더 이상 가야의 유물이 아닌 신라의 유물이 나옴으로써 그 변화상을 직접 볼 수 있다.

달이 차면 기우는 것과 같은 것이 국가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금관가야는 이러한 역사적 수순을 밟고, 결국 역사로 남게 되었다.

금관가야 세 왕의 유적이 있는 왕산(王山)

금관가야가 멸망한지 4년 후 구형왕은 승하(昇遐)하고 석릉에 장례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힐까.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구형왕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의 유언을 따르는 가야 군졸들의 마음도 비통하기 이로 말할수 없었을 것이다. 구형왕릉이 있는 경남 산청군 금서면 왕산은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대왕과 훗날 흥무대왕으로 추대된 김유신 장군의 유적이 서린 금관가애 마지막 왕도이자 남국의 명산이다. 산의 이름이 왕산(王山)으로 명명된 것도 이러한 연유다.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왕이 왕위에 등극한지 121년인 임인년(壬寅年·서기 162년)에 권태를 느껴 태자에게 왕의 지우를 전해주고, 지품천(현 경남 산청군) 방장산(왕산) 가운데 별궁을 짓고 태후와 더불어 이거(移居=이주)한 후 선도(仙道)를 수련하고 자호(自號:자기의 호를 스스로 부름)하기를 ‘보주황태황’이라 하고 태후를 ‘보주황태후’로, 산은 ‘태왕산’, 궁전은 ‘태왕궁’이라 했다고 전한다. 구형왕의 손자인 김서현은 왕산사(王山寺)를 창건했고, 그와 그의 아들 김유신은 수로왕의 사당을 왕대(王臺)에 추봉하고, 구형왕의 사당을 왕산사에 세웠다.

신라 30대 문무왕은 구형왕의 외5대 손자로 폐찰된 왕산사를 거급 수리하게 하고, 왕릉 근처의 30경(頃)의 전답을 봉해 줘 제상 공급 비용을 삼게 했다.

그러나 절과 왕릉은 수많은 우여곡절과 여러 국가와 세대를 거치는 동안 무너지고 물에 잠겼고, 잡초도 우거졌다. 고려시대 왕릉과 사찰을 중수(重修)했으나 조산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절과 왕릉이 피폐해졌다. 1650년 다시 왕릉이 중수됐으나, 또 다시 왕릉과 사찰은 제 모습을 잃어 그 유래 조차 알 수 없게 됐으나 1798년 산청유생 민경원이 왕산사의 궤짝에서 ‘왕산사기’를 찾아내 왕릉이 금관가야 마지막왕인 구형왕릉으로 확인되었다.

구형왕릉의 제 이름 찾는 것이 절실

구형왕릉은 지난 1971년 국가화재 사적 214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구형왕릉’이 아닌 ‘전(傳) 구형왕릉’으로 표기되어 있다. 사료의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본래의 이름을 확정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남 산청 구형왕 덕양전 관계자는 “구형왕릉 앞에 붙은 ‘전(傳)’자를 떼기 위해 그 동안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면서 “그러나 정확한 사료가 없다는 이유로 정부가 관계당국에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확실한 증거를 수집했고, ‘전(傳)’자 꼬리표를 떼낼 수많은 증거를 찾기에 이르렀다.

이어 그는 “그동안 정부에 구형왕릉을 인정해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사료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며 “그러나 최근 결정적인 증거가 될 왕산지와 여러 문헌을 수집 발굴하게 되어 아주 기쁘다”고 말했다.

덕양전 관계자는 “왕산지와 문헌들을 보면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기슭에 위치한 석릉은 가락금 마지막 제 10대 구형왕릉임이 증명됐다”면서 “<왕산지> 원문과 번역문에서 열거한 조선왕조의 고관직과 도승지, 오·병·공·형조 등의 관서를 지낸 조진관, 김희순, 민치량 등과 여러 현감은 물론 돈령부, 도정, 관돈녕, 예조배관, 영의정 등의 제사, 완문, 기문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왕릉 인정서이며 완전한 판결문과도 같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천오백여년 전인 신라 제 30대 문무왕께서 조서를 내려 사당에서 구형왕에 대한 제사를 지낸 기록도 분명히 존재한다”며 “이후 나라의 내우외환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으나 조선 정조 22년(1798년)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200여년을 통해 다시 왕릉에 참배하고 제향을 올렸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우리나라 정부 및 문화재 담당자는 물론 각계각층의 대표와 정향 각지의 유림, 정치인과 정당, 지방자치단체장, 종문 등 많은 사람들이 구형왕릉 앞에서 삼가 경건하게 참배하고 있는 현실이다”라고 덧붙였다.

덕양전 관계자는 “지난 1971년 당시 정부가 구형왕릉을 국가문화재 사적 제214호로 지정하면서 뜻밖에도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으로 명명했다”면서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처사라고 사료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최근 <왕산지> 원본은 숙의·장고 끝에 한 자의 오차도 없이 사실대로 번역화하여 구형왕께서 방장산 동쪽, 산청현 서쪽 왕산자락에 석릉으로 묻혀서 영원히 잠들어 계씬다는 것을 확실하게 고증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지역정책 공약으로 포함할 것을 주문했다.

앞으로 산청군과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에서 구형왕릉에 대한 세밀한 문헌 고증이 이뤄져 구형왕릉이 본래의 이름을 되찾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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