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잎부터 달랐던 정현, 韓 테니스 역사 한 획 긋다
떡잎부터 달랐던 정현, 韓 테니스 역사 한 획 긋다
  • 한종민 기자
  • 승인 2018.01.30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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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가 재미없었던 적이 없었다”
22일(현지시각)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2018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16강 경기. 정현이 노박 조코비치를 상대로 경기를 펼치고 있다.

[파이낸셜투데이=한종민 기자] 이번 2018 호주 오픈을 통해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정현(22·한국체대). 그가 지금의 위치에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을까.

정현은 1996년 수원에서 ‘테니스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대한항공 실업 테니스 선수 출신인 아버지 정석진(52)씨는 정현의 모교인 삼일공업고등학교 테니스부의 감독까지 역임했다. 형인 정홍(25)은 현대해상에서 활약하고 있는 현역 선수이며 2월 5일 국군체육부대로의 입대를 앞두고 있다. 거기에 물심양면으로 두 아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어머니가 계셨기에 정현은 테니스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트레이드마크 ‘고글’은 안 좋은 시력때문

정현은 7세에 고도근시와 약시 판정을 받았다.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돼버린 고글은 바로 좋지 않은 시력 때문이다. 정현은 눈에 좋은 초록색을 자주 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테니스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아버지 정씨는 정현이 테니스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두 아들 중 한 명은 테니스가 아닌 공부를 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어쩔 수 없이 정현에게 테니스 라켓을 쥐어주면서도 “테니스가 재미없어지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지만 정현은 “테니스가 재미없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테니스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호주오픈 누리집 대문을 장식한 정현.

처음부터 테니스를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던 정현이지만 취미로 잡던 라켓은 그를 자연스럽게 테니스의 길로 인도했다. 정현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2007년에 6개의 전국대회를 모두 우승하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주니어급 테니스 대회 중 가장 권위 있는 두 대회인 오렌지볼과 에디 허 인터내셔널 12세부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IMG(International Mangement Group)와 계약한 후 13살 때부터 미국 플로리다에 위치한 IMG 볼리티에리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2년간 훈련을 받았다. IMG는 골프, 야구, 미식축구 등 총 9개 스포츠 종목의 선수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세계적인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로 현재까지 정현의 소속사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 후, 수원북중에 입학한 정현은 2011년 소속부의 시즌 전관왕을 이끌었고 16세부 오렌지볼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테니스를 이끌 유망주로 급부상했다.

녹색 자주 보라는 의사 권유에 테니스 시작
초등학교 5학년 때 6개 전국대회 우승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인 2012년부터는 삼성증권의 후원을 받으며 더욱 더 테니스에만 몰두하게 됐다. 삼성증권은 지금은 은퇴했지만 한국 테니스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이형택이 몸담았던 팀이다. 삼성증권의 김일순 감독과 윤용일 코치의 지도를 받은 정현은 한 층 더 강력하고 빨라졌다.

정현은 이번 2018 호주 오픈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노바크 조코비치(31·세르비아)를 꺾은 후 중계카메라 렌즈에 ‘보고있나?’라는 문구를 적어 전 세계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이는 삼성증권 팀의 갑작스런 해단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김일순 감독을 향한 세레머니였다.

정현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보고있나?’라는 문구 위에 ‘캡틴’까지 적었는데 너무 위에 있어서 안보였다”고 밝혔다.

윤용일 코치는 이형택의 코칭을 맡기도 했었던 선수 출신의 베테랑 지도자이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코트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노력하는 정현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본 윤용일 코치는 아시아 남자 선수 중 최고 랭킹을 보유한 니시코리 케이(28·일본)를 잡겠다는 목표로 5년 동안 정현과 함께 투어를 다니며 정현을 키워냈다. 윤용일 코치는 정현에게 코트 안에서는 승부욕을 가지되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그것이 지금의 훌륭한 인성과 정신력을 가진 정현을 만들었다.

그 후, 정현은 2013년 윔블던 주니어 대회에서 준우승, 2014년 창삿 방콕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일찌감치 군 문제까지 해결했다. 2015년에는 챌린저급 대회에서 4회 우승하며 세계랭킹을 50위권까지 끌어올렸다. 파죽지세였다.

13세 때 IMG 인연 맺고 유망주로 급부상
2016년 슬럼프 뒤 바닥서부터 다시 시작
4개월 후 더 빠르게 성장, 영어마저 능숙

그러나 세계의 벽은 높았다. 승승장구하던 정현에게도 2016년 슬럼프가 찾아왔는데 세계랭킹 100위 이내의 선수들이 뛰는 메이저 투어 대회에 본격적으로 나선 후부터였다. 2016 호주 오픈에서는 1차전부터 노바크 조코비치(31·세르비아)를 만나 패배의 쓴 맛을 봤다. 그 후로도 여러 대회에서 본선 진출에조차 실패하며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한 정현은 프랑스 오픈에서 동갑내기 캉탱 알리스(22·프랑스)를 만나 세트스코어 0-3으로 스트레이트 패배를 당한 후 돌연 투어 중단을 선언했다.

일각에선 “유망주 하나가 또 이렇게 소리 없이 사라진다”라는 말부터 “한국 테니스의 한계다”, “정현은 거품이 낀 선수”라는 말까지 많은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정현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전략이었다.

이제 막 메이저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한 전도유망한 스무 살의 젊은 청년이 선택하기에는 매우 힘든 결정이었지만 정현은 스스로 바닥까지 내려가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본인의 투핸드 백핸드는 세계 정상급으로 평가받는 반면에 서브와 포핸드 스트로크에 많은 약점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독한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립부터 완전히 바꿨고 포핸드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일본 코치를 초빙해 서브도 강화했다. 멘탈적인 측면에서는 전 테니스 국가대표인 박성희 박사와의 심리 상담으로 도움을 받았다. 이 공백기에 정현의 랭킹은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지만 애초에 랭킹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정현은 재정비에만 몰두했다.

26일 로저 페더러와의 호주오픈테니스 4강전에서 기권한 정현이 물집 투성이인 발바닥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정현 인스타그램

그렇게 4개월의 업그레이드 기간을 가진 정현은 코트에 복귀에 전보다 한층 더 향상된 실력, 그리고 더 빠른 성장속도를 보였다. 2017년 바르셀로나 오픈 방코 사바델 대회에서 6연승을 거두며 8강전에 진출했고 8강에서 라파엘 나달(32·스페인)을 만나 아쉽게 패배했다. 그리고 같은 해, 독일에서 열린 BMW 오픈 2차전에서는 세계랭킹 16위였던 가엘 몽피스(32·프랑스)를 만나 승리를 거두며 4강까지 올라갔다. 그 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넥스트 제너레이션 ATP 파이널(한 해 동안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7명과 와일드카드를 받은 1명이 출전하는 21세 이하 남자 선수들의 왕중왕전)에서 우승을 거두며 다음 세대의 테니스계를 이끌어갈 선두주자로 우뚝 섰다.

화면을 넘어 전달되는 놀라운 집중력

이번 호주오픈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이면서 자연스레 현지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는데 정현은 영어마저 능숙하게 구사하여 놀라움을 샀다. 사실 정현의 영어 구사 능력은 2년 전까지만 해도 미숙했다. 정현은 영어를 독하게 배우기로 마음을 먹은 후 미국 드라마를 보며 흥미를 붙였고 친구 데이비드 현도를 투어에 종종 동행시키며 틈틈이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생각을 단순하게 하여 코트 안과 밖을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해 코트 밖에선 라켓도 잡지 않고 테니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정현. 그가 코트 위에 서서 경기를 시작할 때면 그 집중력이 중계 화면을 넘어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가 이번 호주 오픈에서 보여준 놀라운 경기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완성된 모습이 아니다. 지금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어 자칫 그 부담감에 짓눌리거나 분위기에 취해 자만할 수 있지만, 이를 경계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꾸준히 노력한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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