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성 강화와 보험료 인하 압박 속 딜레마…실손보험 사라질 수도

[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이른바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이 발표된 가운데 보험사들이 실손의료보험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겉보기엔 건보 보장성 강화에 따라 실손보험 가입자에 지급될 보험금도 큰 폭으로 줄게 돼 보험업계에 이득이다. 하지만 이에 따라 당국의 보험료 인하 압박도 커질 것으로 보여 실손보험 손해율이 큰 보험사들 입장에선 계산이 복잡해지는 상황이다.

일각에선 비급여에 치중된 실손보험이 이번 보장성 강화 대책에 따라 장기적으로 규모가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실손보험에 일대 변화가 찾아오게 된 상황에서 보험업계도 금융당국의 움직임에 시시각각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서 건강보험 보장강화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5일 금융 당국에 따르면 금감원은 문재인 케어가 실손의료보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보험료 책정이 적절한지 판단을 내릴 것이라 밝혔다.

문재인 케어의 골자는 3800여개에 달하는 비급여 진료 항목을 건강보험 보장성 항목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비급여는 의료 치료비 중 국민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치료로 환자가 전액을 자가 부담하는 치료비를 말한다. 비급여가 보장성 항목에 포함되면 건강보험의 보장을 받을 수 있다.

보장성 강화와 보험사의 실손보험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실손보험금이 급여·비급여를 막론하고 모든 치료비에 지급되기 때문이다. 급여 항목의 경우 건강보험의 보험금을 제외한 나머지 진료비에만 실손보험금을 지급하고, 비급여 항목은 전적으로 보험사에서 지급하게 돼있다. 즉 이번 대책에 따라 보장성이 강화되면 보험사가 지급해야 할 보험금도 줄어드는 셈이다.

보험사로선 보험금이 덜나간다니 일견 좋아 보이지만,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정부의 보험료 인하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출범 직후 정부는 서민 생활 안정화 대책으로 각종 보험료와 수수료 등을 인하하겠다는 의지를 수차례 밝힌바 있다. 카드업계는 이미 올해 한차례 가맹점 수수료 수혜범위 확대로 수천억대의 손해가 예고됐다고 울상이다.

불과 한달 전에도 당국과 보험업계는 실손보험을 둘러싸고 ‘아웅다웅’을 반복했다. 당국은 국민에게 보편화된 실손보험의 보험료를 내려야 한다고 보험사를 압박했다. 보험사들은 실손보험 손해율이 120~130%에 달해 ‘팔면 팔수록 손해’라며 가격 인하를 거부했다. 그러자 당국은 보험사들이 공시한 손해율이 적절한지를 감리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건보 보장성 강화 대책으로 보험사들의 속셈이 한층 복잡해졌다. 이번 대책이 현실화되면 현재 여신금융협회에 공시하고 있는 손해율 지표가 무의미해짐에 따라 당국의 실손보험료 인하 압박에 저항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보험사들은 2015년 금융위의 ‘보험가격 자율화 정책’ 발표 이후 높은 손해율을 빌미로 실손보험료를 고삐 풀 듯 올려왔다. 올해 들어선 롯데손해보험이 32.8%로 보험료를 가장 많이 올렸고 이어 ▲현대해상 26.9% ▲KB손보 26.1% ▲메리츠화재 25.6% ▲동부화재 24.8% ▲삼성화재 24.8% ▲흥국화재 21.1% ▲한화손보 20.4% 순으로 보험료를 인상했다. 특히 흥국화재는 지난해 보험료 상한폭인 35%를 뛰어넘는 수준의 실손보험료 인상을 단행하기도 했다.

앞서 금감원은 보험사들의 실손보험료 책정에 대한 감리를 오는 9월까지 마칠 계획이라 밝혔다. 또한 문재인 케어에 따라 추가로 영향 분석에 나서게 돼 당국의 보험료 인하 압박은 기정사실로 보인다.

이번 대책에 따라 실손보험 수요가 전반적으로 줄어들게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2022년까지 비급여 항목이 전부 없어짐에 따라 금융소비자들이 실손보험을 들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손해율이 높아 ‘계륵’에 가까운 실손보험을 보험업계에서 포기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오면서 문재인 케어 발표 이튿날인 지난 10일 주식시장에서 주요 손해보험주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남석 KB증권 연구원은 “실손의료보험에서 보장하는 비급여가 건강보험으로 편입될 경우 손보사 입장에서는 지급보험금 감소뿐만 아니라 위험보험료의 상당액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손해율 개선이 이루어지더라도 이익의 증분 규모는 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대해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문재인 케어 자체가 기존 실손보험 체계를 뒤엎을만한 수준의 변화라 당혹스러운 상황”이라며 “금융당국의 움직임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당장 손해율이 높다 하더라도 가입자가 3500만명에 달하는 대형 시장인 만큼 중장기적 성장동력이라는 것이 내부 판단”이라며 “이번 당국의 감리 결과 등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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