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된 악습에 노동자는 뒷전

▲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 생산직에서 3년간 일하다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지난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반올림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무노조 경영’으로 악명 높은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뉴 삼성’에서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최근 삼성의 사업장 곳곳에서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노조의 투쟁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노조설립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시대착오적이란 삼성의 무노조경영원칙이 달라질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 노동조합은 대부분 이름만 있고 아무런 활동이 없는 사실상 유령노조에 가깝다. 그나마 한국비료공업(현 삼성정밀화학)과 국제증권(현 삼성증권)에서 시작된 노조만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을 분이다.

삼성계열사들에서 일어나는 노조설립 움직임은 여전히 매우 제한적이다. 개별 기업의 매각이나 비정규직 하청 계열사와 같은 특수한 사정으로 노조설립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 형식에 그친 안전교육

삼성의 반인권적인 무노조 경영이 이어지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뒷전이 된지 오래다. 반도체 와 LCD 공장 등에서 직업병이 심각했던 이유다.

삼성반도체 기흥사업장 생산직에서 3년간 일하다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반도체에서 일어난 집단 백혈병 문제는 우리 유미만의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황씨에 의하면 삼성반도체에서는 세척 등의 공정을 2인 1조로 진행하는데 맨 처음 황유미씨와 함께 조를 이뤘던 최모씨가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 유산을 하고 퇴사를 했다. 이후 최씨를 대신해 고 이숙영씨가 들어왔고, 그로부터 6~7개월 뒤 황유미씨에게 백혈병이 발병했다. 또 1년 뒤인 2006년 같은 공정에서 일하던 이씨 마저도 백혈병을 얻어 그해 사망했다.

이처럼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집단 백혈병’ 사건 대부분은 특정 생산라인에서 발생했다. 반도체 원판을 화학물질로 세척하는 1~3라인에서다.

기흥사업장에서 설비엔지니어로 일하다 2004년 백혈병이 발병해 2005년 사망한 고 황민웅씨의 부인 정애정씨도 해당 사업장에서 생산직 직원으로 근무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정씨는 “작업라인에 들어가기 위해선 방진복을 입어야하는데 이 자체도 외부 유해물질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제품보호를 위해 입는 것”이라며 “창문조차 없는 완전 통제된 공간 속에서 지독한 화학약품 냄새와 엄청난 압력, 윙윙거리는 소음 등을 감수해야하기 때문에 한 두 시간만 지나면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고 삼성반도체 공장 내 작업환경 실태를 지적했다.

시대착오적인 경영철학…달라질 기미 안보여
노조결성 움직임에 와해시도…검찰 ‘무혐의’

이어 “노동조합도 만들 수 없는 상황에서 여직원들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자기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죽기 살기로 일을 해야 한다”며 “또 안전교육도 형식에 그치거나 교육을 했다고 입을 맞추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고 말했다.

최근 삼성전자가 프린팅솔루션 사업부문 일체를 미국 HP에 포괄 양도하는 방식으로 매각을 결의했을 때도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됐다. 노조가 존재하지 않는 삼성 안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삼성전자 프린팅솔루션 사업부문 직원들의 분위기는 냉랭하다. 이미 수차례 매각에 대한 루머가 돌았음에도 직원들에게 단 한 차례 언질이 없었다는 점에서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전환배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직원들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직군은 HP가 매각을 직접 요구한 개발직군이다. 반면, 영업마케팅을 비롯한 이외 직군의 불안감은 크다. HP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펼치는 기업으로도 알려져 있어, 매각 완료 이후 고용보장에 대한 의구심이 짙은 것이다.

이에 일부 직원들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추진 중이다. 고용승계 등 고용보장을 비롯해 위로금 등을 요구하기 위함이다. 앞서 삼성과 한화, 삼성과 롯데 간 빅딜 과정에서도 매각 대상이었던 계열사들이 각각 노조를 설립하며 고용승계와 위로금 증액을 위한 활동을 펼친 선례가 있다.

삼성은 노동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오히려 노조 와해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 말고도 노조가 주장하는 삼성의 노조탄압의혹 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대표적인 게 ‘S그룹 노사전략’ 문건 유출 사건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지난 2013년 10월 삼성그룹의 ‘S그룹 노사전략’을 공개하면서 그 동안 삼성그룹이 부인해 왔던 무노조 경영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 출처=뉴시스

이 문건에는 삼성에버랜드와 같이 노조 설립을 와해한 사례뿐만 아니라 노조 설립이나 설립된 노조를 와해하거나 고사하는 계획과 모의까지도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관련 문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이뤄졌지만 삼성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 명분 없는 억압

이와 관련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검찰을 향해 “삼성의 법무팀이냐”며 ‘삼성봐주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심 의원은 “(삼성그룹의 노조 와해 전략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 망라돼 있음에도 검찰은 삼성그룹에 대한 수사 결과를 지난 2년여 동안 질질 끌다가 지금 이 시점에 무혐의 처분으로 내놓았다”며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현재 노동계에서는 삼성이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민의 기본권이 함부로 유보되던 시절의 무노조 경영이 21세기에도 지속돼야 할 명분은 없다는 것이다.

노동계 관계자는 “사회적으로도 우리는 사회 안정과 수출 확대 등의 명분을 내세워 대기업의 노동3권이 유보되는 것을 관대히 넘겨 왔던 게 사실”이라며 “삼성은 경영철학의 핵심에 ‘인간존중’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노동권을 보장하는 헌법 앞에서의 무노조 경영은 경영철학이 아니라 억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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