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대 금융 스캔들 주인공

▲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1997년 초 한보철강의 부도로 시작된 대기업의 연쇄부도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같은해 12월까지 부도를 냈거나 부도 유예가 적용된 대기업이 10여곳에 이르렀고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가해 IMF체제를 불러들인 큰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특히 한보그룹은 정관계 인사가 얽히고 얽힌 ‘한보사태’의 장본인으로서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한 때 재계 14위까지 올라섰던 한보그룹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한보그룹은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과 성장·몰락을 같이했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빈농인 정용석씨와 황맹옥씨의 1남1녀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정 전 회장은 26세가 되던 49년 첫 번째 부인 김순자씨와 결혼했다.

정 전 회장은 결혼 후 세무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부산경남지역 일선 세무서에서 하위직인 주사보로 일했다. 김 씨가 사망하자 정 전 회장은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정 전회장은 둘째 부인 이수정씨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한보그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보상사를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씨와 결혼을 한 정 전 회장은 1970년대 초 일제시절 폐광이 된 강원도의 몰리브덴광산을 사들여 1974년부터 몰리브덴을 주력으로 수출하는 한보상사를 설립해 기반을 다진다.

몰리브덴수출이 성과를 이루자 정 전 회장은 주택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75년 정 전 회장은 한보주택의 모태가 된 서울 구로동 영화아파트 172가구를 건립하면서 건설업에 뛰어 들었다.

이후 강남구 대치동의 쓸모없는 유수부지 7만여평을 매입해 당시 단일 물량으로 최대 규모였던 2200세대를 은마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분양했고 2400세대를 추가 분양해 큰 돈을 만지게 됐다.

정 전회장의 부인 이 씨는 건설현장에서 일꾼들의 새참을 나르고 자금을 구하려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닐 정도로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회사일을 챙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회장은 83년 이씨가 암으로 타계하자 경기도 김포의 부인 묘소를 6개월에 걸쳐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했다.

정 전 회장은 은마타운 성공분양의 여세를 몰아 19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 한보종합건설로 상호를 변경하고 해외건설에 뛰어들었다. 이후 주택과 상사, 종합건설, 목재, 탄광, 상가 등으로 계열기업을 확장했고 은행관리업체였던 태화방직을 인수했다.

이 씨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84년 정 전 회장은 금호철강을 인수해 한보철강을 설립했다. 이 때 한보그룹의 재계 순위는 30위권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한보그룹의 성장세는 여기까지였다. 1986년을 기점으로 한보그룹은 철강을 제외한 대부분의 업종에서 적자를 기록하는 등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회장님과 함께 한 그룹의 ‘흥망성쇠’
무리한 제철소 사업…부도의 시발점

이에 정 전 회장은 감량경영과 계열사 처분·합병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돈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강남구 수서·대치 지역 개발제한구역 땅을 사들인 정 전 회장은 ‘통큰’ 로비를 벌였다. 보통 사람들이 예상하는 액수에 ‘0’을 하나 더 붙여 정관계 인사들에게 전달했고 덕분에 해당 땅을 택지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정 전 회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서면서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봤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정 전 회장의 무차별적 로비가 1991년 수서비리 사건으로 불거진 것이다. 사건이 표면화되면서 서울시와 건설부, 정치권에 있던 수많은 공직자들이 옷을 벗었고 정 전 회장도 뇌물공여죄로 구속됐다.

당시 서울시장이던 고건 전 총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특정 업자에게 특혜분양을 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경질됐을 정도로 정 전 회장의 로비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정 전 회장은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한보철강을 통해 추가 금융지원을 받으며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 한보철강은 아산만에 새 공장을 건설하는 등 철강 호황기를 만나 급성장했고 1995년 기준 한보그룹 재계순위는 24위까지 올랐다.

한보그룹이 재기에 성공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보그룹은 난관에 부딪혔다. 새로 지은 당진제철소가 투자금 문제로 발목을 잡은 것이다.

실제 당진제철소는 초기 건립 투자금으로 2조2800억원을 염두에 뒀지만 착공 2년만에 5조7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이는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한보 측의 주장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면서 투자비를 계속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한보그룹은 18개의 회사를 설립·인수하면서 재무구조는 더욱 악화됐다. 1995년 11월 기준 한보그룹 계열사 수는 26개였다.

결국 한보그룹의 외부차입금이 5조원이 넘어가면서 제철소 완공 이후에도 적자경영이 불가피할 것으로 뒤늦게 판단한 금융기관이 대출금 회수에 나서면서 1997년 한보그룹은 최종 부도처리됐다.

이는 IMF 관리체계의 신호탄으로 기록됐다. 1997년 4월 삼미그룹과 진로그룹이 부도유예에 들어갔고, 5월에는 대동주택이, 7월에는 기아그룹 등 연쇄부도가 발생했다.

한보그룹 부도 이후에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부정 사건으로 꼽히는 한보사태가 터졌다. 정 전 회장과 정관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한 이 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다.

한보사태의 핵심은 당진제철소 투자에 있었다. 한보그룹이 당진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할 당시 건설부는 부지매립 허가를 9개월만에 내주고 통상산업부는 검증도 되지 않은 코렉스 공법의 채택을 적극 권유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정부차원의 견제는 없었던 것이다.

1997년 5월 한보사태로 인해 정 전 회장은 공금횡령과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징역 5~20년형을 선고받았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됐고,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여당인 황병태 의원과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 뿐만 아니라 야당인 정대철, 권노갑 의원을 비롯 김우석 내무부장관, 문정수 부산시장 등이 대출 관련 청탁 또는 국정감사 선처 청탁 등으로 뇌물 수수에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기도 했다.

재판 도중 해외도피…호화로운 생활
로비로 흥하고 로비에 몰락한 ‘제국’

이후 정 전 회장에게는 ‘비리백화점’, ‘로비의 귀재’라는 대명사가 따라 붙었다. 정 전 회장은 5년 5개월을 복역하다가 고혈압·협심증의 병세로 석방됐다.

그러나 2005년 강릉영동대학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2심 재판 도중인 2007년 신병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현재까지 해외 도피 중에 있다.

정 전 회장의 자녀들도 아버지와 함께 몰락했다.

먼저 장남 종근씨는 대성목재 회장으로 있던 1996년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그룹 계열사 3곳에 우량 어음을 넘겨주고 계열사 어음을 받는 방법으로 모두 224억원을 불법 지원했다. 2002년 불구속 기소된 종근씨는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차남 원근씨는 한보그룹이 자금난에 시달리던 1996년 6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거액의 도박을 벌인 혐의로 기소됐다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벌금 500만원,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받았다.

삼남 보근씨와 그의 아내 김 모씨는 정 전 회장이 1980년대 설립한 학교법인 정수학원이 운영하는 강릉영동대학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려왔다.

이들은 2013년 3월 5일 대법원으로부터 업무상 횡령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 됐다. 아내는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선고 받았고, 함께 기소된 보근씨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녀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됐다.

사남 한근씨는 1997년 동아시아가스를 세운 뒤 회삿 돈 320억원을 수위스의 한 은행 계좌로 빼돌린 혐의로 검찰의 추적을 받자 1998년부터 10년이 넘는 기단 동안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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