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음료’, 어떤 것을 드시겠습니까?

[파이낸셜투데이=배효주 기자] 1급 시각장애인인 허모씨는 갈증이 나는 여름일지라도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 마신 적이 없다. 수십 가지가 넘는 음료수 캔 상단의 점자표기가 모두 ‘음료’로 통일 돼 있어 상품명은 물론이고 커피인지 탄산음료인지조차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점원을 불러 설명을 요청하기도 몇 차례, 이제는 그 마저도 미안한 마음에 음료수 사 마시기는 포기했다고 말했다.

음료업체들이 시각장애인들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캔 음료 상단에 점자 표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음료의 특성과 종류를 불문하고 ‘음료’로만 표기돼 있어 어떤 제품인지 구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있으나마나한 점자표기에 시각장애인들이 기호에 따라 음료를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가 박탈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음료들 구분 ‘불가’

현재 마트와 편의점 등에서 판매 중인 캔 음료를 살펴본 결과, ▲롯데칠성음료 (칠성사이다·펩시콜라·마운틴듀·트로피카나스파클링·미린다·밀키스·칸타타·레쓰비·게토레이·핫식스·솔의눈·델몬트 스카시·델몬트 스퀴즈·델몬트 레몬에이드·세븐업·티스파클링·2% 부족할 때·잔치집식혜·초코라떼) ▲립톤(립톤) ▲한국 코카-콜라(코카콜라·스트라이프·환타·조지아·킨사이다·암바사·파워에이드) ▲동아오츠카(포카리스웨트·데자와·오란씨·나랑드) ▲광동제약(비타500) ▲남양유업(프렌치카페) ▲동서식품(맥스웰하우스·맥심 티오피) ▲팔도(비락식혜·산타페) 등이 캔 상단의 점자를 단순히 ‘음료’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수십 가지에 달하는 제품 중 단 하나도 음료의 특성이나 제품명을 점자로 표기한 것은 없었다.

이에 대해 음료업체들은 표시 공간의 협소와 시스템 부족 등 각각의 이유를 내놨다.

▲ 점자 표기가 동일하게 돼 있는 음료 제품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는 “캔 상단에 점자를 기재한 취지는 주류와 음료를 구분, 시각장애인들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과거 제품명을 기재하면 좋겠다는 문의가 몇 차례 있었지만 캔 상단에 점자를 표기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해 제약이 있다. 점자의 크기를 줄이게 되면 시각장애인들이 인식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고 설명했다.

동아오츠카와 동서식품 관계자는 “제조업체에서 이미 일괄적으로 상단에 점자 표기가 돼 있는 캔을 받아서 내용물을 넣어 유통하고 있다”며 “상품 마다 점자를 다르게 표기할 시스템 자체가 구축이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팔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음료 상단에 ‘음료’라는 점자 표기를 하기 시작했으며, 그 전까지는 음료 상단에 점자 표기가 자체가 없었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현재 공식적으로 등록된 시각장애인만 25만명에 달한다. 음료업계가 25만명의 소비자를 놓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음료 제품명 점자 표기 ‘無’…선택권 박탈
업체들 “표기 공간 협소하고 시스템 없다”

이에 대해 시각장애인들은 이미 ‘불편한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놨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음료업체들이 점자로 ‘음료’라고 표기하는 것 자체가 좋은 뜻에서 하는 것은 맞지만, 말 그대로 ‘이것은 마실 수 있는 음료’ 라는 정보만 줄 뿐 개인의 특성이나 기호는 고려하지 않은 표기법인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시각장애인들이 상점에서 음료를 고를 때도 애로가 발생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제품을 마실 때도 역시 불편함을 겪고 있다”며 “상품의 특성이나 종류에 대한 점자를 표기해주면 시각장애인들이 음료를 이용하기에 훨씬 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의 불편이 제기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시민 단체가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을 통해 자금을 모으는 한편 관련기관에는 올바른 점자 표기를 위한 청원을 제기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소나무장학회 내 대학생 단체인 ‘나들’ 2기는 ‘시각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다’는 제목의 온라인 펀딩을 시작했다. ‘음료란 음료는 없다’는 문구를 점자로 새긴 팔찌를 판매해 발생한 수익금의 70%를 실로암 점자 도서관에 기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나머지 30%는 점자 팔찌 및 팔찌와 함께 교부되는 점자 엽서 제작비로 사용된다. 팔찌를 구매한 사람들은 실로암 점자 도서관의 후원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다.

▲ 소나무장학회 나들2기가 판매중인 점자 팔찌. 사진=소나무장학회

소나무장학회 관계자는 “원하는 음료를 선택하기 어려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생활 속에서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취지의 점자 팔찌를 만들었다”며 “팔찌를 차고 손으로 점자를 읽으며 우리 사회 속에 소외된 이들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프로젝트를 진행한 계기를 밝혔다.

◆발 벗고 나선 단체

당초 50만원을 목표로 했던 이 모금은 지난 25일을 기준으로 총 1071명이 참여해 1121만1777원을 모았다. 시작한지 29일 만에 목표액의 2242%가 넘는 금액이 모인 것이다.

또한 이들은 대기업과 여러 국가기관에 청원서와 제안서를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현재 청원서를 작성 중이며 펀딩이 끝나는 대로 관련 기관에 제출할 계획”이라며 “법원에는 음료 뿐 아니라 각종 상품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표기를 의무화 할 것을 청원할 예정이다. 대형 음료업체들에도 올바른 점자 표기를 위한 제안서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펀딩에 참여한 후원자들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개선되어야할 부분인 것 같다” “예전에 점자를 배우면서 느꼈던 부분인데 프로젝트를 실행해줘서 감사하다”는 등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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