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요금 동결로 올해 목표 인상 폭 사실상 달성 불가
한전채 발행 증가 따른 금융 시장 후폭풍도 우려
‘팔수록 적자’ 역마진 구조 해결 없이는 자구안도 한계

사진=박민규 기자
사진=박민규 기자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정상에 도달한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이 형벌은 무한한 굴레다. 분기별 전기 요금 발표 때마다 거론되는 한국전력공사의 적자가 시시포스의 비극과 다름 없다. 구조적 문제를 자구로 해결하려는 점에서다.

3분기 전기 요금 동결로 국민 부담은 덜게 됐으나, 한국전력의 ‘빚 굴레’ 탈출이 지연되는 등 파장들이 걱정되고 있다. 국제 유가가 하향 안정화되고 천연 가스 가격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수준으로 내려간 등 전기료와 연동되는 연료 가격의 하락으로 적자 요소는 감소했지만, 고강도 자구 노력을 수행 중인 상황에서 전기료 동결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24일 한전에 따르면 올 3분기 연료 비용 조정 단가는 킬로와트시(kWh)당 5원으로 유지되며, 다른 항목에 대한 조정도 없다. 전기료가 2개 분기 연속 상승세를 멈추고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이는 여름철 냉방 전력 수요 급증을 감안한 속도 조절로 읽히고 있다.

전기료는 물가와 연계되는 이상 비탄력적으로 조정할 수밖에 없고, 이번 동결은 미래 자원 가격 하락분을 고려한 결정이라는 견해 또한 있다. 한전의 ‘마이너스 마진’이 줄어드는 추세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전에 따르면 kWh당 전력 구입 가격에서 판매 단가를 뺀 ‘역마진’은 올해 1월 17.2원에서 3월에 34.0원으로 치솟았다가 4월 7.8원으로 대폭 개선됐다.

그러나 한전의 마이너스 마진 해소가 완전하게 이뤄지지 않은 데다, 45조원 가량이라는 천문학적 액수의 적자를 쌓아 놓은 상황에서 전기 요금 추가 인상은 불가피하다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당초 산업부는 2023년 필요한 전기료 인상 폭을 kWh당 51.6원으로 산정했으나, 지난 1분기와 2분기를 합쳐 누적 인상분은 21.1원에 그쳤다. 3분기 전기 요금은 동결됐고 4분기 조정 가능성도 크지 않아 목표 인상 폭을 채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전기료 인상분이 원가 상승 폭에 미치지 못하면서, 한전의 적자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 회사는 전력 구매비 등 운영비 마련을 위해 외부에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며 1분기에만 이자로 1조원 이상을 지불했다. 일 116억여 원 지출 꼴이다. 올 들어 발행된 한전 채권은 11조원이 넘는다.

한전채 발행 규모는 1월 약 3조2100억원에서 감소세를 지속하며 이달 8000억원까지 줄었지만, 전기 요금 동결로 다시 늘면서 ‘금리 폭탄’이 되는 것 아니냐는 염려가 나오고 있다. 채권 시장 ‘우등생’ 한전채에 매수가 몰리면서 전반적 금리 상승을 초래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한전발 금융 시장 후폭풍에 대한 우려는 더 있다. 한전의 적자는 곧 지분 32.9%를 가지고 있는 산업은행의 손실로도 연결되서다. 산은의 1분기 말 국제 결제 은행(BIS) 기준 자기 자본 비율은 13%대로 3%포인트 가까이 떨어졌는데, 이 가운데 한전 손실로 인한 BIS 비율 하락율이 1.95%포인트로 추산됐다. BIS 비율은 은행의 재무 건전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 지표다. 산은의 재무 구조 악화는 실물 경제를 뒷받침하는 정책 금융의 규모를 감축시킬 수 있다.

190조원대 부채를 기록하는 등 사상 최악의 경영 위기를 맞고 있는 한전은 지난달 25조7000억원 규모 자구안을 발표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참이다. 증권가에서도 한전의 하반기 흑자 전환에 무게를 싣고 있다. 낙관론이 대두했으나, 관건은 적자 탈출이다. 하지만 전기료 현실화가 선결되지 않는 이상 이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여전히 우세하다. 원료는 비싸게 사들이고 제품은 싸게 판매하는 역마진 구조가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전 노조 관계자는 “러-우 전쟁 발발로 연료 가격이 폭등한 상황에서 전기를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 구조상 수익 창출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 판가 인상이 무산되면서, 고강도 자구책에도 불구하고 적자 해소를 위한 중장기 비전에 대한 의문이 이는 상황이다.

문제는 한전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점이다. 정확히는 정부 입김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회사인데 정권 따라 휘둘리고 때로는 포퓰리즘에 악용되면서 내실을 갖추기 힘들어졌다는 지적이다. 실제 일각에서는 이번 전기 요금 동결이 내년 선거(총선)를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전기 요금은 2021년 이후 연료비가 기존 4배 수준으로 올랐을 때도 동결된 바 있다. 한전을 비롯한 전력 그룹사들은 당정의 압박으로 재무 개선 목표치를 발표 석 달여 만에 5조6000억원 상향하기도 했다.

정부의 에너지 요금 동결 기조 외에 신재생 에너지 확대 정책의 무차별적 수용도 한전의 적자를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정부는 올해 봄 태양광 발전 급증에 따라 전력 계통 안정화를 위해 원자력 발전소들의 출력을 낮췄다. 원전 대비 발전 단가가 높은 태양광 중심의 운영으로 한전의 전력 구매비가 늘고 자회사 한국수력원자력의 매출은 감소하게 된 실정이다. 전기 사업법상 한전은 태양광 등 재생 에너지를 우선 구입해야 하는데, 태양광 전력 구매 단가는 1~5월 평균 kWh당 171원으로, 42원에 불과한 원전의 4배 이상이다. 태양광 전력 수급 계약은 한 한전 재직자가 “태양광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최근에도 물 밀 듯 넘치고 있다. 그렇다고 한전이 직영 태양광 발전소를 늘려 계통 한계 가격(SMP)을 낮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전을 향한 “뼈를 깎는” 자구 요구가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악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걱정 역시 나온다. 성장 동력 약화 관점에서다.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올해 1조9000억원 규모의 해외 사업 구조 조정에 나서며 현재 요르단 가스 복합 화력 발전소 및 풍력 발전소, 필리핀 디젤 발전소와 석탄 화력 발전소에 대한 지분 매각을 추진 중이다. 자회사인 한국남부발전도 인도네시아, 호주 유연탄 사업 매각 공고를 냈다. 이들 6개 사업 경우 투자비 대비 평균 회수율이 200%에 달하는 등 수익성이 높아, 매각은 당장의 위기 모면을 위해 미래 먹거리를 팔아 치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일례로 매각이 추진되고 있는 요르단 알카트라나 가스 복합 발전소는 2012년부터 25년간 1조3500억원의 매출과 2480억원의 순이익을 거둘 것을 기대된 바 있으며, 최근 5년 동안 매년 200억원 정도의 순이익을 내 오며 우량 자산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전이 알카트라나 포함 요르단 2개 사업 매각으로 벌 수 있는 취득 가액은 최대 989억원으로 추정된다.

발전 자회사 지분 매각도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은 3월 기준 27개 기업에 총 2조9700억원 가량을 출자한 상태다. 5개 발전사와 한국전력기술, 한수원 등이 대상이다. 한전의 매각 지분과 관련, 러시아나 중국 등 자금력 있는 국가에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는 국가 에너지 안보 면에서 우려되는 부분이다.

또 전력 설비 건설 규모 조정 및 시기 이연 등이 한전 자구안에 포함되면서, 전력 업계는 물론 관련 채권 시장 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조 단위 가치가 추산돼 ‘알짜 부동산’으로 꼽히는 서울 여의도 소재 남서울 본부 등이 부동산 불황기에 매물로 나온 것도 아깝다는 평가다.

이러한 가운데 내부 기류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한전은 자구안 중 하나로 임금 인상분 반납을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대규모 적자의 근본적 원인은 역마진 구조와 정부의 전기 요금 동결 기조인데, 애먼 근로자들에게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회사는 노조에 임금 인상분 반납을 설득 중이나 진척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 재직자는 “차장 이상급이야 성과급 얼마 깎이는 걸로 알겠지만, 사원급은 드러누울지도”라고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게다가 한전은 작년도 공공기관 경영 실적 평가에서 처음으로 미흡(D) 등급을 받으며 성과급도 지급하지 못하게 됐다.

실제로 한전에서는 올 들어 정년 퇴직을 제외한 퇴사자 수가 100명을 웃돈다. 퇴사자는 2020년 142명에서 2021년에 168명, 2022년에는 198명으로 증가세다. 이달 중순까지 퇴사자가 109명을 기록한 추세를 감안하면, 2023년 퇴사자 또한 전년 대비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상 임금 삭감’ 때문만은 아니다. 전기 요금을 인상하면 국민 부담이 높다고, 전기료 동결 시에는 적자가 우려된다고 등 터지는 데서 오는 피로감과 정부 기조에 따른 구조적 적자 문제를 경영자에게 책임 묻는 ‘뒤집어 씌우기식’ 정치권 공세에 대한 반발심 등도 일부 작용하고 있다. 한전 직원은 회사가 수익 구조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 정부 정책에 충실한 공기업으로서 자구책의 성실한 이행만 강조하는 상황에서는 미래가 안 보인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전은 정승일 전 사장의 사퇴로 차기 사장 공모에 나섰고 하마평에 오른 인사들 중 4선 국회 의원 출신 김동철 전 의원이 유력하며 사실상 내정됐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나, 내부 분위기는 냉소적이다. “어차피 정부 입김에 놀아나는 회사인데 아무 의미 없다”는 전언이다.

자구 노력의 실효성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기댈 구석은 연료 가격 하락이라는 운적인 요소 밖에 없는 시스템은 비정상적이다. 국가 전력 수급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곳이 적자는 회사 차원에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더 비정상적이다.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좀처럼 손보지 못하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날 부작용을 우려만 해 왔고, 발등에 불 떨어진 작금에 와서도 머뭇거리고 있다. 전 정권의 탈원전 정책이 남긴 후유증이라는 비판만 산재하다.

국민 부담을 고려한 전기 요금 동결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기준 연료비 인상 등으로 제시되는 합리적 전기료 시스템 등 한전이 ‘적자 무한궤도’를 벗어나도록 도울 구제책이 필요하다. 적어도 정치권 이해관계 속에서 두들겨 맞는 한전의 고충을 이제는 알아 줘야 하지 않을까.

파이낸셜투데이 박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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