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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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스마트폰 출고가가 100만원을 넘어가면서 교체 주기가 2년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죠. 그런데 뒤에 ‘0’이 하나 더 붙고 앞자리도 달라지는 자동차를 부담 없이 2년마다 갈아탈 수 있게 해달라는 노조가 등장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임금 협상을 4년 연속 무분규 타결하며 ‘귀족노조’ 이미지를 벗어내고 있던 현대차 노조입니다. 사실은 ‘귀족노조’ 타이틀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단체협약 요구안에 25년 이상 장기 근속한 정년 퇴직자에게 제공하던 ‘2년마다 신차 25% 할인’ 제도를 모든 정년 퇴직자에게 확대 적용해달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취지는 그럴싸합니다. ‘조합원 간 불평등을 없애자’는 것입니다.

이번 노조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퇴직자들은 5000만원짜리 그랜저 최상위 모델을 3750만원에 살 수 있게 됩니다. 2년 뒤 차량을 중고차 시장에 내놔도, 현대차 중고차 가격 방어가 잘 되는 편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득을 볼 수도 있습니다. 차를 팔고 또 혜택을 받으면 됩니다. 2년마다 새 차로 갈아타는 데 전혀 부담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요구안 내용을 더 살펴보면 그 탐욕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집니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 단체협상 요구안에 기본급 18만4900원 인상(호봉승급분 제외), 전년도 순이익의 30%(주식 포함) 성과급 지급, 상여금 900% 지급 등을 담았습니다.

이와 별도로 정년을 국민연금 수령 시기에 맞춰 만 64세로 연장하고, 전기차 신공장 관련 인력 운영방안 마련, 기존 파워트레인 고용 변화 대응 등을 포함했습니다.

이 밖에도 260억원의 주거지원금 재원을 520억원으로 증액하고, 직원 할인 차종 확대, 80만원의 명절 귀향비를 100만원으로 인상, 유류비 5만원 인상, 식사 시간 10분 유급화, 30만원의 하계 휴가비를 100만원으로 인상 등을 요구했습니다.

끝이 아닙니다. ‘40년 이상 근무자’라는 구간까지 신설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금 13돈(48.75g), 휴가비로 통상급의 150% 지급 등 1100만원에 달하는 혜택을 요구했습니다.

지난해 현대차 순이익은 7조9836억원으로, 노조 요구안의 30%(2조3951억원)을 적용하고 전체 직원 수(약 7만명)으로 나누면 1인당 약 3400만원입니다. 지난해 현대차 직원의 1인 평균 급여액은 1억500만원. 상여금 900%로 환산하면 1인당 약 7900만원을 받게 됩니다. 연봉을 제외하고 요구안에 나온 금액만 1억원이 넘습니다.

노조 요구안이 알려지자마자 날 선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지난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분노한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고, 회사가 어려워지면 할인은커녕 일터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부담을 고스란히 부담해야만 할 소비자들을 바보로 취급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는지 정말 어처구니없다”며 “현재의 비이성적 노동운동은 반드시 정상화되어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지원사격에 나섰습니다. 홍 시장은 같은 날 페이스북에서 “강성 귀족노조의 패악과 싸우는 원 장관을 응원한다”며 “좌파들의 온갖 음해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법 집행을 하고 있는 원 장관을 보면서 문재인 정권의 비정상을 정상화 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고 밝혔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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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노조는 ‘악으로 깡으로’ 강력한 투쟁을 벌이겠다고 예고한 상태입니다. 당초 21일 예정이던 현대차 공동현장조직위 출정식은 금일(22일)로 연기됐습니다. 우천이 예상됨으로 인해 단 한 명의 조합원이라도 더 참석하기 위한 조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노조는 “올해 교섭이 시작되면, 사측은 어김없이 어렵다고 할 것이고, 정원은 정당한 투쟁을 배부른 노동자의 투쟁으로 매도할 게 뻔하다”며 “사측의 ‘곳간 걸어잠그기’와 정권의 ‘언론 통제’ 협공을 막을 것은 단결된 노동자의 투쟁뿐이다. 올 여름 투쟁으로 돌파하자”고 독려했습니다.

물론 현대차는 지난 1분기 사상 최대 수준의 실적을 기록하긴 했습니다. 1분기 영업이익은 3조5927억원으로 전년 대비 86% 증가해 시장 기대치를 24%나 상회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대차의 복지 수준은 과도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퇴직 후 1~2년 동안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KG모빌리티를 제외하면, 수입차는 물론 한국GM, 르노코리아차 등 완성차 업체에는 퇴직자에 대한 차량 구매 할인 제도가 없습니다. ‘장기근속자와 퇴직자들의 헌신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는 명분이지만 사실상 기득권 챙기기로 보이는 이유입니다.

지난해 현대차 지속가능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차 전체 근로자 7만2600여명 중 50세 이상 인원은 3만2032명으로 44%로 ‘주류’입니다. 30세 미만 직원은 7516명(10%)에 불과한 ‘비주류’입니다. 이번 현대차 노조 요구안에 담긴 혜택 대부분은 ‘주류’ 직원에 돌아가는 구조입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던 GM은 노조 때문에 파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00만명이 넘는 직원과 퇴직자, 그 가족의 의료보험료로 한 해 60억달러(약 7조7000억원)을 지급해야 했고, 회사 시총 4배를 웃도는 600억달러를 퇴직자에게 연금으로 지급해야 했습니다. 노조에 끌려다니던 GM은 결국 해당 비용은 제품 가격에 반영했고,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면서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급여를 포함해 현대차 노조가 받는 각종 혜택은 소비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옵니다. 이번 노조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조합원 간 불평등은 해소될 수 있지만, 소비자들과의 불평등은 심화합니다. 현대차에서 매년 정년퇴직하는 이들은 2500여명에 달합니다. 이들이 원가보다 싸게 차를 사면 그 차액은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노조가 싸게 사면 소비자는 더 비싸게 사야 합니다.

이번 현대차 노조의 요구안에 소비자는 없습니다. 현대차가 국내 독점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국산차를 사주자는 소비자들의 ‘애국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가 등을 돌리면 일터가 사라집니다. 일터가 없어지면 그 피해는 퇴직자가 아닌 일하는 직원에게 돌아갑니다.

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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