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양지훈 기자
사진=양지훈 기자

“중립(보유)이면 사실상 팔라는 뜻이겠지. 증권사 리포트 하루 이틀 읽는 것도 아니고.”

최근 엔씨소프트의 주가가 급락하면서 증권사들이 잇따라 투자 의견 ‘중립’을 제시하자 주식투자에 열중하는 지인이 했던 말이다. 엔씨소프트의 신작 ‘블레이드 앤 소울 2’가 게이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주가가 대폭 하락하자 삼성증권‧이베스트투자증권‧한국투자증권‧한화투자증권 등 주요 증권사들은 목표 주가를 대폭 낮췄고, 투자 의견을 ‘매수’에서 ‘보유’로 내렸다.

지인이 한 말은 애널리스트가 특정 종목에 관해 투자 의견 ‘보유’를 제시한다면 사실상 ‘매도’로 해석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의미다. 애널리스트가 ‘매도’를 제시하는 사례가 흔치 않으니 지인처럼 주식투자자 중에서는 ‘중립 = 사실상 매도’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말 기준 투자 의견을 제시하는 국내 증권사 32개사의 투자 등급 평균 비율은 ▲매수 91.5% ▲중립(보유) 8.4% ▲매도 0.1%였다. 보고서 10건 중 9건은 투자 의견이 매수다.

증권사들은 특히 매도 의견 제시에 난색을 보인다. 32개 증권사 가운데 매도 의견을 한 번이라도 제시한 곳은 6개사에 불과했다. 의견 표명이 부담스러운지 투자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Not Rated)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증권사 보고서를 믿을 수 없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애널리스트들은 그들만의 표현 방식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린다.

증권사는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 애널리스트들은 기업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매도 의견을 쉽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정 기업을 대상으로 매도를 제시하면 애널리스트는 기업 탐방과 자료 수집 등 기업 분석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여러 활동에 제약이 따른다는 것이다. 즉, 애널리스트가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애널리스트가 매도 의견을 거의 제시하지 않는 풍토가 고착화되자 금융당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금융감독원은 2017년부터 ‘목표 주가-실제 주가 괴리율 공시’ 제도를 시행해왔다. 애널리스트가 투자 의견과 목표 주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제시하는 기현상을 바로 잡고, 객관적인 보고서 작성을 유도해 신뢰도를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2019년 금감원 ‘증권사 리서치 보고서 제도 운용 현황 분석’ 자료에 따르면 목표 주가-실제 주가 괴리율 공시 제도 실시 1년 경과 시점에서 투자 의견 ‘매수’인 리포트의 비율은 76%로, 제도 시행 전과 사실상 같은 수준이었다. 국내 증권사의 매도 의견 비중(0.1%)이 외국계(13%)보다 현저히 낮은 현상도 제도 시행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차라리 투자자가 보고서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소비자단체 한 관계자는 “투자자가 증권사 보고서에 제시된 투자 의견을 맹신하지 말고, 보고서를 참고자료 수준으로만 받아들이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획기적인 대안이 없으니 소비자단체의 의견은 현실적인 절충안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애널리스트가 자발적으로 소신 발언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애널리스트 한두 명의 소신 발언으로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매수, 중립, 매도 등 어떤 의견이든 자유롭게 제시하는 문화가 업계 전반적으로 정착해야 독자들도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할 것이다. 애널리스트가 기업의 눈치를 봐야 하는 악습을 바로잡으려면 이해관계자들의 협의와 개선 의지가 필요하다.

파이낸셜투데이 양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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