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연맹 초기부터 변한 지역 주요 국가였던 안라국
철 생산 기반으로 국가경제 및 세력 확장
관산성 전투에 국가 운명 걸어, 패배 후 신라에 합병

함안 말이산 고분군. 아라가야의 왕족과 귀족들이 묻혔다. 사진=함안군청
함안 말이산 고분군. 아라가야의 왕족과 귀족들이 묻혔다. 사진=함안군청

가야연맹 6가야 중 하나로, 경남 함안에 자리 잡았던 아라가야(이하 안라국). 확인된 유적이나 유물들이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미뤄볼 때 안라국은 가야연맹 초기부터 변한 지역의 주요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전기 가야연맹은 금관가야(이하 가락국)을 중심으로 서기42년부터 400년까지 형성됐다. 가락국은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경자대원정’에 의해 수도인 김해까지 함락되며, 쇠퇴의 길을 걷다가 522년 멸망한다.

이후 가야연맹은 대가야(이하 반파국)와 안라국을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이 형성된다. 반파국이 신라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자 남부 가야국가들은 안라국을 중심으로 힘을 뭉쳤으나 끝내 통합하지는 못했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세력 확장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안라국은 가락국과 함께 중국 군·현과 교섭하면서 중국에 잘 알려진 유력한 정치집단이었으며, 인구는 4~5천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나라의 구조는 국읍과 읍락으로 구성되는데, 안라국의 국읍은 현 경남 함안군 가야읍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라국 남쪽 계곡 사이의 평야들과 낙동강·남강 배후 습지를 이용한 농경은 경제적 기반이 됐다. 또 강을 이용한 교통로 확보와 교통 요충지로서 이점을 살린 경제적 이익도 국가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고대 삼한지역 여러 국가들은 중국 군현들과 일본을 비롯한 인근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삼한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계 유물과 일본계 유물이 그 증거물이다.

안라국 창원시 진동면의 진동만 혹은 창원시 마산만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이용한 해로를 이용해 대외교역을 했던 것을 추정된다.

안라국은 풍부한 철광석과 숙련된 제련기술을 바탕으로 중무장한 기마병을 거느렸다. 사진=함안박물관
안라국은 풍부한 철광석과 숙련된 제련기술을 바탕으로 중무장한 기마병을 거느렸다. 사진=함안박물관

안라국은 철과 수산자원도 풍부했다. 고대 국가들의 초일류 기술인 ‘제련기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철 생산이 필수였다. 안라국은 함안군 군북면 일대에 직접 철광과 동광을 운영하면서 제철 산업을 발전시켰다.

현재 경남 함안 지역에는 황철광인 제1군복광산이 있고, 동광의 산출지로는 함안 광산과 군북광산이 있다. 특히 동광 산출지에는 황철광이 함께 산출되고 있어 동광의 개발과 함께 철광석도 채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라국은 3세기말~4세기초 사이 국가적 대변화를 맞았다. 철은 주변 국가와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척하며 세력을 키웠다. 또 철제농기구가 발전하며 농업 생산력이 증가했다. 이시기 고식도질 토기와 대형 덧널무덤이 등장했으며, 지배자의 무덤에는 다량의 철소재 부장품, 철제갑주 등이 출현했다.

남은 기록 없어 영역 설정 어려워

서기 400년. 가야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가야·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 내물왕의 구원 요청을 받고 친히 5만 군사를 이끌고 남정을 떠났다. 당시 광개토대왕의 남정은 ‘고구려-신라’ 연합군과 ‘백제-왜-가야’ 연합군의 대립이었으며, 고구려-신라 연합군이 승리했다.

이 전투로 인해 가락국은 국읍이었던 김해까지 함락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반면 안라국은 ‘백제-왜-가야’연합군의 일원으로 고구려-신라 연합군과 맞서 싸웠지만 실제 전투는 가락국 영토에서 펼쳐져 안라국은 전쟁의 피해가 한결 적었다.

고구려 남정 이후 전기가야연맹체는 큰 변화가 생겼다. 연맹체의 맹주국이었던 가락국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안라국과 반파국이 새로이 맹주국의 역할을 이어갔다.

안라국은 가야연맹체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녔었다. 그러나 가락국과 반파국에 비해 지방통치 체제나 영역 확대를 보여주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안라국의 영역을 설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안라국의 국읍이었던 함안군 일대에서는 지석묘가 많이 발견된다. 이를 토대로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촌락이 형성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함안지역 청동기인들은 평지와 구릉지를 개간해 농경생활을 했고, 차츰 성장해 기원전·후기때 안라국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함안군 일대 산지에는 정확한 축조 연대를 알 수 없는 다수의 산성이 분포하고 있다. 이 산성이 분포하고 있다. 이 산성들은 인접 국가들의 침략을 막기 이한 중요한 방어수단이었을 것이다.

함안 파산봉수대. 사진=함안군
함안 파산봉수대. 사진=함안군

안라국 북쪽에 흐르고 있는 낙동강과 남강은 자연적 방어수단의 역할을 했다. 서쪽의 방어산성은 백제의 진출을 막기 위해, 남쪽의 여항산성과 파산봉수는 남해안 진출 교두보 및 외적을 막기 위한 시설물로 추정된다.

특히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 합포구 진북면 경계에 위치한 ‘대형관문’은 진동만으로 연결되는 도로 조성으로 볼 때 안라국의 중요한 경계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쪽의 포덕산성은 창원시 마산 회원구 방면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그 북쪽의 성지봉산성-검단산성-성산성-안곡산성-칠원산성과 연결되어 신라의 서쪽 진출을 방어했다.

5세기 함안지역 대표 토기인 불꽃무늬토기는 안라국 권역을 알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토기는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비롯 칠원면 오곡리 유적, 창원 현동·도계동 유적, 의령 예둔리 유적·유곡리 고분군·봉두리 고분군·진북 대평리 고분군, 진주시 진양 압사리 고분군 등이다.

또 불꽃무늬 토기의 분포지역을 통해 안라국의 최대 영역은 함안을 중심으로 서쪽 진주시 일부지역, 북동쪽 창원시 일부 지역, 서북쪽 의령 일부지역, 남동쪽 창원 마산 합포구 진동지역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연속된 외교정책 실패로 쇠퇴 가속화

6세기 무렵 안라국은 백제와 신라의 가야권 진출로 인해 권역이 많이 축소됐다. 안라국은 남부가야연맹을 주도해 나가며 동·서쪽에서 세력을 넓히는 신라군과 백제군에 맞서 군사적·외교적으로 대항했다. 특히 안라국은 왜 세력을 활용해 가야연맹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본서기’ 계체·흠명기에는 6세기 가야지역을 둘러싼 고구려·백제·신라·왜 등 여러나라가 각축전을 벌이는 모습이 자세히 실려있다. 이 시기 역사 자료들 대부분은 ‘백제삼서’를 바탕으로 구성 됐지만, 8세기 일본 고대 천황주의 사관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많아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고증이 끝난 일본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안라국 중심 대외관계 동향을 크게 3시기로 나눈다.

제1기는 백제가 반파국 영토였던 기문(현 전북 남원), 대사(현 경남 하동)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로, 기문을 상실한 반파국은 백제에 대립해 신라와 결혼동맹(522~529년)을 체결했다.

당시 안라국은 백제의 기문지역 진출에 대해서 묵인했으며, 백제의 기문 진출로 인해 가야 맹과 반목하게 됐다. 이러한 가야연맹의 갈등을 틈타 신라는 가야지역의 도가·고파·포나모라 등 3성을 함락 시켰으며, 이후 북쪽 경계의 5성까지 함락시키면서 가야지역을 잠식해 나갔다. 이 시기 안라국은 백제와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신라와는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다.

제2기는 백제가 기문·대사 지역을 완전 장악하고, 신라가 낙동강 서남부 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안라국의 외교적 역할이 두드러진 시기다. 안라국은 529년 백제와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에 대해 가야지역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안라회의(고당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522년 반파국과 신라의 혼인 동맹이 배경이 됐다. 당시 반파국 이뇌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구혼을 청해 신라 왕실의 사람을 왕후로 받아들였다. 이뇌왕의 왕후는 100여명의 종자를 데리고 반파국에 왔고, 반파국과 신라의 혼인 동맹을 알리기 위해 이들을 가야연맹 곳곳에 배치했는데, 이들이 신라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

몇 년 후 신라측에서 정치적 위신을 가야연맹에 과신하기 위해 비밀리에 종자들에게 신라 의관을 입게 했으며, 가야의 소국들은 이를 두고 반파국왕이 신라와 굴욕적인 맹역을 맺었다고 의식하기 시작했다.

탁순국(현 창원시 소재했던 가야소국)왕 아리사등은 반파국왕의 허락 없이 종자들을 쫓아냈다. 신라는 이를 빌미삼아 탁순국의 북경 5성과 도가 3성을 함락시켜 영토의 반이 날아갔으며, 탁기탄국(현 밀양시에 위치했던 가야 소국)은 신라에 멸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후가야연맹내 남부가야는 맹주국인 반파국을 불신하게 됐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안라국은 백제와 신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백제·신라·왜를 초청해 안라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당시 안라국은 이 회의를 통해 신라에게 압박을 가해 탁기탄국을 재건하고, 안라국의 위치를 올려 탁순국의 압력에서 벗어나길 원했으나, 백제와 신라는 안라회의를 안라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백제는 안라회의에 최고 직위였던 좌평을 보냈지만, 신라는 17관등중 11등급인 내마를 보냈다.

당시 안라국은 의도적으로 백제를 배제했다. 백제는 회의에 참석했으나 고당에 오르지도 못했다. 이는 백제가 대사지역(현 경남 하동)으로 진출한 후 남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라지역을 잠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가져온 결과였다. 신라도 낮은 관등의 관리를 파견해 안라회의 자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안라국의 성장을 대외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안라회의가 끝나자 백제와 신라는 가야지역으로 진출을 가속화했다. 백제는 하동~함안 사이의 지역에 걸탁성을 축조했고, 신라는 남가라(가락국의 하대 명칭)·탁기탄 지역을 멸망시켰다.

안라국은 안라일본부(안라에 파견된 왜 사신)를 이용해 안라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라국은 백제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신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었고,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안라일본부가 신라와의 외교활동을 주도했다.

백제의 성왕은 남가라·탁기탄·탁순 등 이미 멸망한 가야제국의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비회의’를 개최했으나, 백제가 가야지역에 지속적으로 ‘군령성주’를 두는 등 안라지역 진출 의도를 버리지 않자 안라국을 비롯한 가야제국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안라국은 신라·백제와의 외교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자 고구려와 밀약(548년)을 통해 백제를 견제코저 했다. 안라국의 요청에 의해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했으나, 백제는 신라 구원병과 협공을 펼쳐 고구려를 물리쳤다. 이로써 안라국의 외교정책은 실패만 연속됐다.

제3기는 안라국이 다시 친백제 성향으로 전환된 시기다. 안라국 주도의 외교적 활동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다시 백제와 화친을 도모했고, 554년 백제와 신라가 충돌했던 관산성(현 충북 옥천)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 안라국은 2만여명에 달하는 군대를 파병했다. 안라국이 이 전투에 국운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가야 연합군은 신라에 패배했고, 남아있던 가야제국들은 차례로 신라에 합병되었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가 안라국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경남 창녕 진흥왕 순수비. 사진=한국관광공사
경남 창녕 진흥왕 순수비. 사진=한국관광공사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는 556년 비사벌(현 경남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했고, 557년에는 경북 김천지역에 감문주를 설치했다. 561년 창녕에 건립된 진흥왕 순수비는 이러한 상황을 말해주는 근거이다.

특히, ‘일본서기’ 흠명기 22년(561년)조에 “신라가 561년 아라 파사산에 성을 축조해 일본에 대비했다”는 내용을 통해 안라국의 멸망을 추정해 볼수 있다. 아라는 안라국을 뜻하며, 파사산은 함안군 파산으로 비정할수 있으며 현 함안군 봉화산을 가르킨다.

파산 봉수대는 안라국이 해안으로 진출하는 중요 루트인 창원시 진동지역과 함안군의 경계지역에 있으며, 진동만과 함안 일대를 비롯해 낙동강과 남강 너머까지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안라국의 중요전략기지인 파산 봉수대에 신라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미 신라가 안라국을 복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서기’ 흠명기 23년(562년)조에 “어떤 책에는 21년(560년)에 임나가 멸망했다”라는 기록을 참조해 본다면 안라국의 멸망 시기는 560년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안라국이 멸망한 후 도왜선(渡倭船)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안라국 출신들은 일본 도착 후 그들의 성씨를 ‘아야씨(안라씨)’로 불렀으며, ‘혈(穴)’,‘예(濊)’자 등을 차자(借字)하여 썼다. 그들은 백제인과 더불어 일본 고대사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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