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이 걸어온 길] ‘파란만장’ 64년 인생사
[문재인이 걸어온 길] ‘파란만장’ 64년 인생사
  • 한종해 기자
  • 승인 2017.05.15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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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혹은 운명이 나를 이끌었다”
[파이낸셜투데이=한종해 기자] “평탄치 않은 삶이었다. 돌이켜보면 신의 섭리, 혹은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고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19대 대통령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이 2012년 대권 도전을 앞두고 펴낸 저서 <운명>에 담겨있는 내용이다. 운명과 숙명, 그리고 선택의 연속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64년간의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가난했던 유년시절

문재인은 1953년 경남삼도 거제군 명진리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 이북(함흥) 출신 피난민인 부친 문용형 씨와 모친 강한옥 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문재인 가족은 북한출신 피난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숙명과도 같았던 가난
독서와 신문에 대한 갈증

문재인 가족에게 가난은 숙명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장사 실패 후 어머니가 근근이 생계를 꾸렸는데 성당에서 배급받은 강냉이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허다했다.

“교사나 공무원을 하면 맞을 아버지가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장사를 시작하셨지만 잔뜩 빚만 지고 손을 털고 말았다. 받을 돈은 받지 못하면서 갚아야 할 돈은 끝내 갚느라 오랫동안 허덕였다. 아버지는 이 장사의 실패를 끝으로 무너지고 말았고 끝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6~7세의 문재인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구호물자를 받기위해 성당 앞에 늘어선 긴 줄에 서야 했다. 그가 수녀드르이 모습에 감화돼 천주교 신자가 된 것도 이맘때다.

문재인은 <운명>에서 “검댕을 묻히는 연탄배달 일이 늘 창피했다”고 회고했다. 집안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는 연탄을 배달했다. 문재인은 그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연탄리어카를 밀었다.

문재인은 <운명>에서 가난은 자신에게 자립심과 독립심을 선물로 줬다고 회상했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나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1965년 남항초등학교, 1968년 경남중을 졸업한 문재인은 부산지역 최고 명문이었던 경남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학창시절 그는 ‘문제아’로 통했다. 처음에는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지만, 친구들과 학교 뒷산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다가 걸려 유기정학을 받으면서 진짜 문제아가 됐다.

하지만 성적은 비교적 상위권을 유지했다. 신문과 독서에 항상 갈증을 느꼈다. 학교도서관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학생은 항상 문재인일 정도였다.

첫 번째 재수-대학입학

대학 입시를 앞두고 문재인은 역사학에 목말랐다. 하지만 주변의 권유로 서울대 상대에 응시했고, 낙방했다. 이후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더 높은 학교를 갈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이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경희대 법대 4년 장학생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

문재인이 경희대에 입학한 1972년은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이 심했던 해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10월 유신을 선포했고, 이에 반대하는 대학마다 탱크가 진주했다.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생들은 시국을 개탄하고 울분을 토로했다. 문재인도 그중 1인이었다. 사법 고시 준비 대신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캠퍼스 커플이던 부인 김정숙 씨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이라는 대규모 공안사건을 조작한 1974년 문재인은 뜻이 맞는 친구들과 총학생회를 장악하고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듬해인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한 다음날 문재인은 사법살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돼 그해 6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교도소로 이송되던 날, 호송차의 동전만 한 구멍을 통해 어머니가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소리쳐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의 구속을 뒤늦게 알고 급히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가 어디 의지할 데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검찰청에서 우연히 호송차를 타는 나를 발견했던 모양이었다.”

석방 후엔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강제 징집돼 창원 39사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그해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됐다. 그는 군 시절 폭파과정 최우수, 화생방 최우수 표장을 받았고, 공중낙하, 수중침투, 천리행군, 고급 인명구조 훈련 등을 거뜬히 치러낸 명실상부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1978년 2월, 31개월 만기 제대한 문재인은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을 마주하게 됐다. 문재인은 아버지 49재를 마친 다음날 바로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고시공부에 매달혔다. 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2차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매달리던 1980년 10‧16 부마항쟁에 이어,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지면서 시대가 급변했다.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복학 논의가 시작됐지만,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국은 다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문재인은 1980년 학교로 돌아갔다. 고시 공부를 제쳐두고 복학생 대표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해 4월 치른 2차 시험은, 다음을 준비하자는 마음이 앞섰다.

한달 뒤 5‧17 확대 계엄 조치 발동으로 문재인은 구속됐다. 당시 경찰서 유치장에서 문재인은 2차 사법시험 합격 통지를 받았다. 경찰서에서는 조촐한 소주 파티가 열렸다. 경찰 사상 전무후무하게 경찰서장은 축하 차 면회를 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사법연수원 시절, 구속과 강제징집, 군생활, 고시 공부 등 7년을 곁에서 지켜준 연애해온 김정숙과 결혼했다.

“아내가 면회를 왔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군대의 면회란 무조건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와야 하는 거였다. 아무리 가난한 어머니라도 통닭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먹는 것은 아예 없이 한 아름 안개꽃 다발을 안고 왔다. 그 꽃을 여러 내무반에 나누어 꽂아줬더니 다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발군의 성적을 보여주던 문재인은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 문턱에서 좌절하게 됐다. 그런 그에게 국내 최대 대형로펌에서 스카웃 제의를 했지만, 문재인의 선택은 고향 부산이었다. 홀로계신 노모를 모시며,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인으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노무현 변호사와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처음 둘은 동업자 관계였다. 그러나 서서히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맡다보니 자연스레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두 사람의 법률사무소는 부산, 울산, 창원, 거제 등 노동자들의 인권센터를 방불케 했다.

문재인은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부산 NCC 인권위원을 맡았다. 부산 YMCA 이사와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도 맡았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창립하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정치권으로부터의 러브콜을 한사코 거절하던 문재인은 2002년 노 전 대통령이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비서실 민정수석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러나 과로로 건강을 상했고,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훌쩍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휴식은 길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곧장 귀국한 문재인은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다가 탄핵 재판 이후 다시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던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날만큼은 나도 그 속에 휩쓸리고 싶었다. 아름다운 밤,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싶은 순간이었다. 그때로서는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은 생각지도 못했다.”

문재인의 청와대 시절은 대쪽으로 통했다. 업무시간 외엔 직접 차를 몰았고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했다. 격무에 시달리다 못해 무려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였다. 약점으로 지적되는 그의 발음은 그때 받은 임플란트 때문이다.

2007년 3월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됐다.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고, 한미 FTA가 체결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참여정부와 임기를 함께 마친 문재인은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와 소박하고 평온한 삶을 보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병박 정권은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을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고, 모든 비난은 노 전 대통령에게 쏟아졌다.

그러던 2009년 5월 23일 새벽,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빨리 와주셔야겠습니다. 대통령님이 산책 나갔다가 산에서 떨어지셨습니다.”

두 번째 재수-대권도전

다음날 문재인은 노무현 국장(國葬)의 상주가 됐다. 이후 친노 진영의 결집이 시작됐고, 고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던 문재인은 2012년 4‧11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여의도에 입성했다. 총선승리 두 달 후, 문재인은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안철수 후보,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야권 단일후보가 됐다. 하지만 18대 대선 결과, 득표수 1469만표, 특표율 48.02%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대부분을 모두 파기했다. 국정원 대선공작 불법 선거가 드러났고,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문재인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의 2‧8 전당대회에서 현 국민의당 박지원 대표와 혈투를 벌인 끝에 당대표로 선출됐다. 그러나 문재인은 친문과 비문 진영의 갈등이 심화됐고, 그해 12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비롯한 일부 비문 의원들의 탈당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닥드렸다.

노무현과 인권변호사 활동
盧서거 후 본격 정치입문
18대대선 실패, 재도전

문재인은 김종인 전 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고,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민주당은 4‧13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선전, 제1당이 됐다.

지난해 연말부터는 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집회, 대통령 탄핵 사태가 이어지며 조기 대선 구도로 급변했다. 문재인은 ‘준비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놓치지 않으며 대선레이스를 달렸다. 안철수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추격전이 벌어졌지만 역부족이었다.

문재인은 자신을 국민의 도구로 써 달라고 간청했다. 정권교체의 삽이 되고, 적폐청산의 벽을 깨는 망치가 되고, 정의로운 반석을 다지는 곡괭이가 되겠다는 것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2017년 5월 10일 오늘 대한민국이 다시 시작합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역사가 시작됩니다. 이 길에 함께해 주십시오. 저의 신명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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