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밤 11시50분께 향년 83살의 나이로 별세
31살에 대우실업 설립, 대우그룹의 시초
급속한 사세 확장으로 ‘킴키즈칸’ 별명 붙어
1998년 말 삼성, LG 제치고 재계 2위 ‘우뚝’
외형확장 치중하다 차입금 천문학적으로 늘어
외환위기 겹쳐 공중분해, 뿔뿔이 흩허진 계열사들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추징금 18조원

사진=연합뉴스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타계했다. 한때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을 일궈내고 이끌었던 그이기에 장례식장 빈소에는 조문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려 9000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고인을 찾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명언을 남긴 김 전 회장에게는 세계경영 전도사라는 ‘명’과 함께 사상 최대의 분식회계와 17여조원에 달하는 추징금이라는 ‘암’이 남았다. 새로운 길을 용기 있게 개척해나갈 것을 권한 김 전 회장이었지만 그의 삶은 기업의 몰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한 편의 드라마였다.

◆ 해외만 신경 쓰다 무너진 내부 구조

1967년 3월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의 무역부장이었던 31세 청년 김우중은 자본금 500만원을 가지고 서울 충무로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트리코트 수출업체인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훗날 대우그룹의 시초다.

대우실업은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셔츠와 내의류 원단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싱가포르에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빠르게 시장을 넓혔다. 설립 1년 만인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을 정도였다. 1970년대 들어서서 대우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아래 급속히 사세를 확장했다. 김 전 회장에게는 ‘킴키즈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칭기즈칸이 동유럽, 중동, 송나라, 고려 등 기병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휩쓸었던 것처럼 김 전 회장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 등 가리는 곳 없이 발을 뻗었다.

1973년 영진토건(대우개발), 1974년 대우전자, 1976년 한국기계를 인수했고 1978년에는 옥포조선소(대우조선),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를 각각 넘겨받았다. 1983년에는 대우전자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묶어 대우전자로 키웠으며 같은 해 동양증권과 삼보증권을 사들여 대우증권을 설립했다. 이후 대우실업이 ㈜대우로 바뀌면서 그룹 회장제를 도입해 그룹 외형을 갖췄다.

1990년대 들어 김 전 회장은 해외 시장에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1993년 세게 경영의 경영 이념을 선포함과 동시에 루마니아, 폴란드, 우즈베키스탄 등 동구권과 구소련 지역에 진출하는 등 확대 경영 전략을 폈다. 1998년 말 대우는 계열사 41개, 국내 종업원 10만5000명, 해외 사업장 외국인 종업원 21만9000명, 해외 법인 396개사의 공룡 재벌로 성장했고 자산 기준으로 삼성, LG를 제치고 현대에 이어 재계 2위로 올라섰다.

◆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세간에 무너져 내린 큰 집(大宇)

그러나 외화내빈이요 속 빈 강정이었다. 110억여 달러에 달하는 대우그룹의 해외 투자는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고 이를 떠받치기에는 내부 구조가 취약했다. 그런데도 김 전 회장은 세계 경영을 포기하지 않았고 국내외 사업장들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차입금을 계속 늘려갔다. 1999년에는 대우그룹 몰락의 화근이 된 쌍용자동차를 인수했다. 외환위기 이후 모든 기업들이 몸을 웅크리던 상황에서 김 전 회장의 선택은 그룹을 유동성 위기로 몰고 갔다.

1998년 12월 8일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10개사를 감축하는 구조조정 세부 계획을 발표하고 1999년 1월 21일 수영만 부지 매각 등의 재무 구조 개선 계획, 4월 19일 대우중공업 조선 부문 매각, 김 전 회장 보유 주식 매각 대금 3000억원 출연 등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안을 잇따라 발표하며 위기 탈출을 모색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GM과의 협상,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 간 협상이 모두 실패하면서 대우는 벼랑 끝에 몰렸다. 결국 6월 말 대우 사장단 전원 사표 제출에 이어 7월 19일 대우그룹은 10조1000억원에 이르는 김 전 회장의 전 재산 담보라는 극약 처방을 제시했다. 이어 채권단이 대우에 신규 자금 4조원 지원을 결의하고 김 전 회장은 퇴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25개로 줄어든 전체 계열사 가운데 ㈜대우, 대우통신, 대우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자동차판매, 대우전자, 대우전자부품, 쌍용자동차, 대우캐피탈, 경남기업, 오리온전기, 다이너스클럽 코리아 등 12개 계열사가 채권단 관리하에 워크아웃을 맞이하게 됐고 대우증권 등 나머지 13개 계열사는 독자적 회생의 운명에 처하게 됐다.

◆ 자동차·조선·전자 등 산업 곳곳에 남은 ‘유산’

2000년 11월 최종 부도 처리돼 법정 관리에 들어간 대우자동차는 우여곡절 끝에 GM이 인수하여 2002년 10월 17일 GM대우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GM대우는 내수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 2001년 1월 쉐보레 브랜드로의 흡수 통합을 선언하며 한국GM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2000년 4월 대우 계열에서 정식으로 분리된 쌍용자동차는 2005년 상하이자동차 그룹에 인수됐다가 판매 부진으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2009년 법정 관리 체제에 들어간 쌍용자동차는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 해고 사태로 노사, 노조 간 갈등 등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고 2010년 말 인도의 마힌드라 그룹에 인수됐다.㈜대우는 대우존속법인과 대우인터내셔널, 대우건설 등 3개사로 재탄생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2010년 포스코에 인수된 후 2016년 포스코대우로 사명을 바꿨다. 2006년 12월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인수된 대우건설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자금난 이후 2010년 한국산업은행에 인수돼 아직 새 주인을 못 찾고 있다.

2000년 대우그룹에서 계열 분리한 경남기업은 충남 지역 건설사인 대아건설에 인수됐다가 2004년 대아건설을 흡수 합병했다. 하지만 2009년 다시 경영난을 겪으면서 워크아웃을 겪었고 2011년 5월 워크아웃을 졸업했다가, 2017년 SM그룹에 인수됐다. 대우종합기계는 2005년 두산 계열로 편입, 두산인프라코어로 재탄생했으며 대우조선공업은 대우조선해양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2012년 국내 조선업계 수주 실적 1위에 올랐지만 현대중공업 인수를 기다리고 있다. 대우중공업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현대정공, 한진중공업과 함께 통합법인 한국철도차량을 설립했다. 이후 한국철도차량의 지분이 2001년 현대자동차에 전량 매각되면서 지금의 현대로템이 설립됐다.

대우전자는 지속적으로 규모를 줄이다가 2002년 말 주력 사업 부문이 대우모터공업에 양도됐고 이 회사는 2003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재출범했다. 채권단이 경영 정상화를 위해 2005년 매각에 나섰지만 인수 가격과 매각 조건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줄줄이 무산되다가 2013년 2월, 8년 만에 동부그룹 품에 안겼다. 그러다 지난해 대유위니아그룹이 대우전자를 인수하면서 지금 사명인 위니아대우를 쓰고 있다.

대우그룹 해체 전 채권단에 인수된 대우증권은 대주주가 한국산업은행으로 변경됐다가 2009년 한국산업은행 민영화에 따라 새롭게 출범한 KDB금융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아휴 미래에셋금융그룹에 2015년 편입돼, 미래에셋대우로 사명을 변경했다. 다이너스카드클럽 코리아는 2001년 8월 현대자동차에 매각돼 현대카드로 탈바꿈했으며 대우캐피탈은 아주그룹에 편입돼 아주캐피탈로 사명을 변경했다.

◆ 남 부럽지 않았던 5년 8개월의 해외 도피 생활

41조원대의 분식회계와 이를 통한 10조원대의 불법 대출과 재산 은닉 혐의를 받던 김 전 회장은 1999년 10월 18일 중국 산둥성의 옌타이 자동차 부품 공장 준공식 참석을 끝으로 종적을 감춘 뒤 해외에서 낭인 생활을 했다. 독일과 베트남, 프랑스 등지에서 지내던 김 전 회장은 2000년 이후 대우자동차 노조가 체포결사대를 조직하고 수배에 나서자 모로코와 수단 등지로 계속 숨어다녔다.

2001년 3월 인터폴 적색 수배 명단에 오른 김 전 회장은 2002년 한국 여권의 유효 기간이 만료됐지만 1987년 가족들과 함께 취득한 프랑스 국적을 이용해 세계 각지를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5년 8개월간의 해외 잠행 생활을 마치고 2005년 귀국한 김 전 회장은 바로 철창신세를 졌다. 이후 심장질환 등 건강 악화로 한 달여 만에 구속집행 정지로 풀려났지만, 2006년 11월 항소심에서 징역 8년 6개월에 추징금 17조9253억원, 벌금 1000만원이 선고됐다.

2007년 12월 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말 마지막 특별 사면으로 사면 복권됐던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구명 로비 의혹 수사 과정에서 추징을 피하기 위해 1000억원대 재산을 숨긴 혐의로 2008년 9월 불구속기소 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받았다.

김 전 회장의 부실 경영이 초래한 대우그룹의 해체는 국가 경제를 흔들었다. 정부는 대우그룹을 살리려고 30조원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하지만 대우그룹은 41조원 분식회계를 저질렀고 30조원의 혈세 대부분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김 전 회장의 추징금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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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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