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판교IC 상공 헬기에서 촬영한 판교테크노밸리 전경. 사진=연합뉴스

‘구로의 등대’, ‘판교의 등대’ 등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악명 높은 게임업계가 주 52시간제 실시, 노동조합 설립, 포괄임금제 폐지 등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근로자들이 사실상 권고사직으로 받아들이는 프로젝트 중단으로 인한 전환배치가 여전히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업계의 구조적인 체질 개선이 이뤄지지 않아 일각에서는 여전히 열악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넥슨이 다수의 프로젝트를 중단하면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직원들 다수가 전환배치 대상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넥슨은 앞서 지난달 중순 모바일사업부와 PC사업부를 통합하는 조직개편을 완료했다. 또 김정주 NXC 대표가 매각 불발 등으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 네오플 창업자인 허민 원더홀딩스 대표를 영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넥슨은 “중단된 프로젝트 소속 직원에 대해선 전환배치를 적극 진행 중이고, 이에 따른 인력감축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당사자와 충분한 협의를 통해 전환배치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넥슨의 해명에도 넥슨 노동조합은 전환배치를 대기하고 있는 인원들이 고용불안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입장이다. 오는 3일에는 게임업계 최초로 고용안정 보장 촉구 집회도 연다.

넥슨 노조 스타팅포인트는 지난달 27일 넥슨지티·넥슨레드 사원들을 대상으로 배포한 안내서를 통해 “올해 초 매각설, 매각이 불발된 뒤에도 이어지는 조직 쇄신에 대한 뉴스, 연이은 프로젝트 중단, 떠도는 소문 등 사실상 구조조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고용불안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고용불안 속에서 우리는 회사에 고용안정에 대한 약속과 노동자에 대한 존중을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게임업계는 대부분 프로젝트별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프로젝트가 중단되면 전환배치 상태로 있다가 사내 타 프로젝트에 합류하지 못하면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이와 함께 게임업계는 포괄임금제로 대표되는 공짜 야근, 마감을 맞추기 위해 잦은 야근과 특근 등 고강도 업무로 과로사를 야기하는 크런치 모드 등 근무환경 체질 개선 요구가 많았다. 이에 넥슨, 스마일게이트 등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등 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산적해 있는 상태다. 게임업계에선 오히려 잦은 야근과 특근으로 인해 과로사의 주범으로 꼽히는 크런치 모드가 ‘프로젝트 중단’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 A는 “크런치 모드는 사실 게임 출시 후 보상만 확실하다면 다들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프로젝트가 중단되면 보통 팀 단위로 이직하는데 팀 단위 이직이 쉬울 리 없다”고 말했다.

또 “열심히 기획해서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도 결정권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프로젝트가 중단된다”며 “그것보다 더 짜증 나는 것은 어떻게 수익을 창출할 거냐며 쓸데없이 비즈니스 모델 갖다 붙이다가 게임의 재미를 해치는 상황”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서 “차라리 프로젝트가 중단되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게임업계는 프로젝트별 근무가 보편적이라 해고는 하지 않지만 프로젝트 중단을 통해 많은 직원이 자발적으로 나가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었다. 경제전문가들이 국내 기업들은 직원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어 고용이 경직적이라 신규 고용을 악화시킨다는 비판하는 것과는 반대의 상황이다.

배수찬 넥슨 노조 스타팅포인트 지회장은 “프로젝트 중단은 권고사직으로 이어지는 게임업계의 고질적 악습”이라며 “사내 다른 프로젝트팀에서 흡수할 수 있는 인원보다 많은 사람이 전환배치되면 흡수되지 못한 인원은 사실상 구조조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다른 게임업계 관계자 B는 “보통 게임사는 프로젝트를 중단하면서 자발적으로 퇴사하는 상황을 만든다”며 “차라리 해고하고 실업 급여를 받게 해주는 것이 낫다”고 비판했다.

이외에도 게임업계가 이직이 자유롭다는 인식이 많은 반면 그만큼 ‘고인 물’이 많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판교가 늙고 있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이직이 잦은 것이 게임업계의 특성이지만 회사를 옮겨 다니는 것은 프로젝트가 중단돼 퇴사한 실무진이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업계 안에서 돌고 돈다는 것이다.

한 IT업계 관계자는 “오래된 게임·IT 기업은 경영진 노화, 파벌 싸움, 사내정치 등 일반 중견기업과 큰 차이가 없다”며 “게임업계 안에서 이직은 자유로운데 신규 유입 인원이 적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게임업계 관계자 C는 “게임업계가 신입을 거의 뽑지 않고 경력직 위주로 채용하고 있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사내정치에서 승리한 사람들과 파벌을 구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직접 서비스하는 게임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결정권을 쥐고 서로 맞장구만 치다가 유저들이 반발하면 실무진 탓으로 돌리고, 게임이 망하면서 실무진이 퇴사해도 관리자급 이상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다른 게임을 맡는다”고 한탄했다.

파이낸셜투데이 변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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