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나계의 에르메스’…진짜가 나타났다 [마이케나스]

패션을 넘어 글로벌 예술로…서울 아뜰리에에르메스 2000년부터 주관한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전통 복원부터 영화 후원까지…문화·예술 지원 확대 창조와 환원 끝에 인정받은 지속적 후원의 가치

2025-02-22     김영재 기자
사진=에르메스코리아 그래픽=김영재

기업이 문화·예술에 자원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국가 경쟁력과 사회에 이바지하는 활동의 총칭인 메세나Mecenat. 그 어원은 로마 제국의 정치인이자 후원자였던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이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입니다. 파이낸셜투데이가 이 마이케나스에 빗대 기업과 문화·예술의 상호 보완적 협력 관계인 상생과 후원을 직접 취재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창작에 대한 깊은 이해, 소재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 실용성과 우아함의 조화.

에르메스가 1837년 한 작은 공방에서 출발해 전 세계 럭셔리 브랜드의 아이콘이 된 원동력이다.

“OOO계의 에르메스”라는 표현이 명품의 상징이 된 것처럼, 이 브랜드의 철학은 아름다움과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며 전통과 혁신의 균형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제품을 만드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에르메스는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포착하며,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을 만들고, 그 가치가 사회로 확산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2008년 피에르-알렉시 뒤마의 주도하에 설립된 에르메스재단은 이러한 철학을 반영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장인 정신과 인본주의적 가치를 계승하면서도, 후원과 자선 활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확장해 나갔다.

현재 재단은 올리비에 푸르니에가 이사장을, 로랑 페쥬가 디렉터를 맡아 이끌고 있다. 

◆亞·歐 아우르는 전시 공간

고급 패션 하우스와 현대 미술은 어쩌면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에르메스에게 예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브랜드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다.

이 같은 기조는 오랜 기간에 걸쳐 글로벌 전시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됐다. 

에르메스재단은 현대미술전문가와 협력하며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총 4곳의 전용 전시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브뤼셀의 라베리에르La Verrière ▲서울의 아뜰리에에르메스Atelier Hermès ▲도쿄의 르포럼Le Forum ▲모젤Moselle 지역 생-루이-레-비슈Saint-Louis-lès-Bitche에 위치한 라그랑드플라스, 뮤제생루이La Grande Place, Musée Saint-Louis는 각 지역의 예술적 맥락을 반영한 창작과 전시 공간. 새로운 시도를 허용하고 실험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실험실이기도 하다.

에르메스재단은 작품을 수집하지 않는다. 그 대신 후원이 필요한 재능 있는 작가에게 제작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시된 모든 작품은 작가의 소유로 남으며 ‘창작 지원’이라는 재단의 본래 취지가 그대로 유지된다.

메종에르메스도산파크. 사진=에르메스코리아, Masao Nishikawa

이 중 아뜰리에에르메스는 특히 한국 현대 미술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2020년부터 안소연 아티스틱디렉터가 전시 기획 및 감독을 맡아 독창적 현대 미술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최근 국내 명품 시장의 성장은 에르메스코리아의 문화·예술 후원을 더욱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

시장조사기업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20년 14조 9964억원이었던 국내 명품 시장 규모는 2022년 19조 6767억원에서 2023년 21조 9900억원으로 더 커졌다. 2024년에는 23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스타작가의 산실,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에르메스코리아는 1997년 설립 이후 예술과 대중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후원을 넘어 예술가에게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일환으로 2000년, 외국기업 최초로 한국 현대미술작가를 지원하기 위한 에르메스코리아미술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올해의작가상, 송은미술대상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에르메스재단이 미술상을 운영하며 작가 지원에 나선 사례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당시 장-루이 뒤마 에르메스 회장은 에르메스코리아의 요청에, 한국의 역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그중에서도 현대 미술과 젊은 예술가의 동반자가 되고자 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의미 있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에르메스는 전통적 방식을 따르면서 살아남은 장인회사고, 1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모든 변화를 견뎌 냈다. 이 새로운 수상 제도가 에르메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또 이 상은 최고의 작가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신진작가가 국제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가시적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로 역대 수상자들은 국내외 주요 전시와 비엔날레에서 활약하며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에서는 한국관 30년 역사를 통틀어 역대 참여작가 39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 중 11명서도호·박이소·김범·김소라·배영환·이주요·정연두·양혜규·김수자·남화연·정은영, 연도순은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수상자거나 최종 후보로 선정된 이력이 있으며, 또는 아뜰리에에르메스 전시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2001년 제2회 에르메스코리아미술상 수상자 김범과 장-루이 뒤마 당시 회장. 사진=에르메스코리아

심사 과정도 철저하다. 

초기 1~3회까지는 한 차례의 추천 및 심사를 거쳐 수상자를 선정한 후 전시와 시상식을 진행했다.

2003년 4회부터는 아트선재센터와 공동 주관으로 진행되면서 심사 방식이 보다 체계화됐다. 5명의 추천위원이 선정한 10명의 작가 중, 다시 5명의 심사위원이 3명의 최종 후보를 가려냈다. 이후 신작 제작을 지원하고 전시를 연 후 최종 수상자를 결정하는 과정을 도입해 공정성을 강화했다.

2007년부터는 메종에르메스도산파크 내 새로 조성된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미술상 전시가 열렸다. 심사 및 수상 과정과는 별도로 관람객이 독립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2008년 에르메스재단 발족과 함께 에르메스코리아미술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재단과의 연계를 통해 에르메스재단미술상으로 확대되며 지원 체계를 더욱 강화했다.

2015년 제16회부터는 미술상이 격년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최종 후보 3인의 전시를 지원했지만, 처음부터 1명의 수상자를 선정해 후원을 집중하는 것으로 방식이 변경됐다.

수상자 선출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 미술계 인사로 구성된 추천위원 5명이 각각 2명씩 추천, 총 10명의 후보작가를 선정한다. 이후 총 6명의 한국 및 해외 미술계 심사위원단이 1차 포트폴리오 심사를 거쳐 5명 이하로 후보군을 압축한다. 같은 심사위원단이 이 후보들을 대상으로 2차 인터뷰 심사를 진행한 뒤 단 한 명의 수상자가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개방성과 공정성이 강조되며, 예상치 못한 신선한 작가가 발굴되기도 한다. 

작품의 새로움과, 또 메시지가 심사에 중요 요소로 작용한다.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드러냈는지, 조형적 완성도와 주제의 전달 방식 역시 심사 기준에 포함된다. 

에르메스재단 측은 “최고의 작가를 가려내기보다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작가를 발견해 한 단계 더 도약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된 상”이라고 의의를 정의했다. 

에르메스재단미술상의 역대 수상자로는 ▲2000년 장영혜 ▲2001년 김범 ▲2002년 박이소 ▲2003년 서도호 ▲2004년 박찬경 ▲2005년 구정아 ▲2006년 임민욱 ▲2007년 김성환 ▲2008 송상희 ▲2009 박윤영 ▲2010년 양아치 ▲2011년 김상돈 ▲2012년 구동희 ▲2013년 정은영 ▲2014년 장민승 ▲2015년 정금형 ▲2017년 오민 ▲2019년 전소정 ▲2021년 류성실 ▲2023년 김희천 작가가 포진해 있다.

2025년 1월 기준, 20여 년 동안 총 44명의 작가가 미술상 후원을 받아 새로운 작품을 제작했다.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열린 류성실 개인전 ‘불타는 사랑의 노래’ 전경. 사진=에르메스코리아

수상자는 파리 재단을 방문해 현지 심사위원이자 멘토와의 교류로 유럽 미술계와의 지속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한다. 이로써 자신의 관심사를 확장하고 새로운 예술적 자극을 받게 된다. 

제19회 미술상 수상자이자 역대 최연소인 류성실 작가의 경우 상금 2000만원과 함께 재단의 초청을 받아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장-미셸 알베롤라 작가와 판화 작업을 진행했다.

제21회 에르메스재단미술상 수상자는 내년인 2026년 2월 말 발표될 예정이다.

◆서울시립미술관, 국가유산청 & 필름게이트

에르메스코리아는 현대 미술과 함께 전통 문화유산 보존과 국내 젊은 영화감독 육성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5년부터 궁궐 문화재의 효율적인 활용 방안과 관람 서비스 개선을 위해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과 한 문화재, 한 지킴이현 국가유산지킴이 업무협약MOU을 체결했으며,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함께 집기를 재현하는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덕수궁 함녕전과 즉조당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 등 에르메스 후원으로 아름지기가 재현 제작한 당시 궁중 생활 집기가 전시됐다. 국내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집기를 기반으로 국가무형유산을 비롯한 각 분야 장인이 직접 제작을 진행했다. 

경복궁 사정전 내부의 상참의 재현품 전시 모습. 사진=국가유산청

지난해에는 국가유산청과의 세 번째 협업으로 조선 시대 편전便殿인 경복궁 사정전 내부에 상참의常參儀 재현품 총 14종, 20점을 일반에게 공개했다. 이를 통해 전통 공예 기술의 정교함과 궁중 생활의 품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9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과 장기 후원 계획을 발표하며, 서울시민이 우수 전시를 보다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도록 했다.

10년간 미술관에 10억원을 후원하기로 한 에르메스코리아는 ▲2019년 서소문본관에 조성된 이미래 작가의 ‘2019 같이 있고 싶다고’를 시작으로 ▲2021년부터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2회째 후원하고 있고, 그 외 ▲이불 ‘시작’전 ▲키키 스미스 ‘자유낙하’전 ▲남서울미술관 상설전인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후원해 왔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따르면 2025~2026년 후원 내용은 아직 조율 중에 있다.

한편, 2021년 하반기부터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협력해 필름게이트 후원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각 1000만원의 비용과 함께 매년 상·하반기 총 10편의 단편 영화 제작을 지원하며, 신인 영화감독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세이프’로 칸 국제영화제 단편 부문 황금종려상을 받은 문병곤 감독도 과거 필름게이트가 발굴한 인재다.

최근에는 제20회 필름게이트 지원작인 이호승 감독의 ‘간청’이 제12회 메릴랜드국제영화제, 제32회 애리조나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 초청돼 호평받은 바 있다.

◆후원으로 완성되는 브랜드 정체성

올리비에 푸르니에 에르메스재단 이사장. 사진=에르메스재단, Alexandre Guirkinger

예술에서 받은 영감이 제품에 스며들고, 다시 그 영감이 사회로 흘러가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연결된다. 창조와 환원의 순환 속에서 에르메스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의 예술나무후원에서 조건부 기부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연장선에 있다.

에르메스는 2023 예술나무후원의밤에서 기업 수상자에 이름을 올리며 후원 활동의 가치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지난 2013년부터 문예위는 매년 예술나무 우수 후원 기업 및 후원자에 대한 시상식을 개최하고 있다. 조건부 기부는 문예위를 통해 기부자가 예술 단체 및 개인을 수혜자로 지정하는 기부금이며, 일반 기부와 구분된다. 문예위에 따르면 그해 에르메스코리아는 서울시립미술관후원회 세마인과 서울시립미술관 주요 전시를 지원하는 데 기부금을 사용했다.

지난해 11월 열린 2024 국가유산사회공헌국제컨퍼런스에서는 국가유산 사회 공헌 우수기업으로 선정돼 국가유산청장 표창도 받았다. 문화유산 보호와 전승을 위한 지속적인 후원의 성과를 인정받은 결과다.

[마이케나스] 목록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집이란?
금호의 목요일 밤은 언제나 아름답다
HD현대중공업, 조선소 옆 예술관
퍼슨 위드 디스어빌리티가 부르는 ‘효성의 꿈’
엔씨소프트, 게임을 뛰어넘어 문화를 플레이하다
재능교육도 안도 다다오도 있는 혜화동 그 길
여의도동 34-8 신영증권 1층엔 비밀의 방이 있다
아모레퍼시픽, 달항아리도 건축이 될 수 있을까?
LG생활건강, 더후로 ‘반짝반짝’ 완성한 메세나 호혜성
1년, 2년, 벌써 15주년…현대약품 아트엠 콘서트의 연륜
“마음 별 나누는 곳”…이어령도 告한 신세계프라퍼티 별마당
충북 음성에서 서울까지…한독, 창립 70주년 개관 60주년
청조 이인희의 ‘청춘’, 한솔 뮤지엄산에서 꽃피다
“발 빠른 신한카드”…새롭고 꾸준한 문화 오디세이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도…“이곳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
샘표 메세나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네
코오롱, 스페이스K로 마곡에 바람바람바람 일으키다
예술을 만끽하고 싶은 날이면 현대백화점에 가야 한다
스타벅스코리아, 예술과 전통과 인의의 별빛메세나
햇살 같은 메세나…에쓰오일, 서울도 울산도 10년 이상이 기본
예술이 걸리는 곳, 노루페인트 컬러 DNA가 숨 쉬는 곳
박카스는 피로 회복, 동아제약 메세나는 문화·예술 회복
29년째 부국제…부산은행, 향토 메세나로 수도권 도전장
국악과 미술에 ‘더 기프트’, 메트라이프생명의 남다른 선택
게임도 이제 문화다, 넷마블이 만드는 색다른 문화 판타지
하트원에서 예술을, 뮤지컬에서 경제를, 이게 하나은행 풀코스
대교, 눈높이 교육에 예술을 더하니 세상이 달라진다
토닥토닥…예술로 힐링하는 바디프랜드의 특별한 선율
롯데장학재단, 외손녀 장혜선 손끝에서 피어나는 신격호의 꿈
‘클래식’한 면사랑의 맛, 나눈 만큼 깊어진 삶
티켓값? 그런 거 몰라요…무료로 즐기는 ‘이건’ 클래식 축제
워킹맘 꿈에 날개를…동서문학상이 건넨 희망의 커피 한 잔
낮에도 저녁에도, 한화생명이 그리는 음악의 풍경
사나이 울리던 농심, 바야흐로 전통문화로 인생을 울린다
겨울, 가을, 봄, 여름… 파마리서치, GIAF로 강릉을 재생시키다
좋은데이만큼 부드럽게 취한다…무학의 예술 이야기
혁신은 연필 끝에서…스테들러코리아, 메세나를 리터치하다
미술관이 환해졌다…삼화페인트공업이 칠했으니까
―‘메세나계의 에르메스’…진짜가 나타났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