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렬 正論] 쇄신과 담 쌓은 국힘과 정치 양극화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새 정부 임기 초기에 여야의 불균형은 불가피하다. 주권자의 선택에 의해 민주적 정당성을 담지한 대통령 정권이 야당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 정권은 두 가지 점에서 야권에 비해 압도적이다. 첫째가 국회에서의 절대 다수 의석이고, 둘째는 내란을 극복한 정권이란 점이다. 그러나 여야 불균형의 심화는 협치와 소통의 장애물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통합·협치를 강조하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의 선의가 관철되는데 지금의 여야 관계는 지나치게 불비례적이다. 이는 국민의힘의 친윤이라고 불리는 구주류의 행태가 주된 요인이다.
불법계엄 이후 한남동 관저로 달려간 국힘 의원들은 아직도 반성문을 쓰지 않는다. 국민에 대한 자기고백도 없다. 여당에 대해서 정치보복 프레임을 씌우려 안간힘이다. 계엄, 탄핵, 대선 패배의 미증유의 정치적 사건 앞에서 안이한 인식으로 일관하는 게 참으로 초현실적이다. 당내 내홍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 국힘은 왜 단호한 쇄신을 결행하지 못하는걸까.
안철수 의원이 지난 7일 혁신위원장직을 사퇴하면서 당 지도부 친윤과 안 의원이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지만 사실상 국힘의 쇄신은 물 건너갔다. 윤희숙 혁신위원장이 새로 선임됐지만 한시적인 데다가 국힘을 지배하고 있는 찐윤과 언더 찐윤, 당 지도부가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보수정당이 쇄신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는 2004년 ‘박근혜 천막당사’다. 당시 대선자금 수사로 인해 ‘차떼기 정당’이란 비난과 ‘노무현 탄핵 역풍’에 직면한 한나라당은 17대 총선에서 “50석도 어렵다”는 비관적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 때 박근혜 당시 대표는 당사 헌납과 천막 당사 이전, 기소된 당원의 당원권 정지, 현역 의원 40.5% 공천 탈락 등의 강도 높은 혁신을 단행했다. 영남의 지지 기반도 상실할 것이란 비관론 앞에서 당내 기득권 세력도 저항할 명분이 없었다.
현재 국힘이 탄핵 정당이란 오명에도 불구하고,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영남 기득권에 휘둘리는 이유는 뭘까. 지역구 의석의 60%에 가까운 의석이 영남에 기반하기 때문일까. 답은 지난 대선 때 김문수 국힘 후보의 득표율에서 찾아질 수 있다. 김 전 후보는 일관되게 윤석열 탄핵을 반대한 강경 수구 세력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41% 득표했다. 이게 핵심이다. 국힘의 기득권, 주로 영남을 근거지로 한 세력은 탄핵 반대 당론에 대한 사과와 반성없이도, 40%의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극도의 기능적 정치공학에만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뱃지만이 그들을 지탱하는 힘이요, 존재근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최소한의 정치역사적 사명감과 염치, 정치적 도의가 사라진 것이다. 반성과 쇄신이 오히려 다음 총선에서 자신들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지지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도의와 윤리에만 얽매일 수는 없다. 현실권력에 기반하는 권력정치가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인 걸 어찌하겠나. 국힘에게 당위적 규범을 강요하는 것도 나이브하다. 한국정치인들의 본질적 속성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정치 양극화가 주범이다. 사안에 대한 이성과 합리에 기반한 인식은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국힘에게 2004년과 같은 천막당사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내 쇄신이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불과하다는 해괴한 논리는 의외로 한국정치의 극단적 모습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수도권에 정치기반을 갖는 현역 의원과 원외인사들에게 지금의 국힘으로선 아무런 희망이 없다. 아직 다음 총선이 목전이 아니라서 쇄신의 동력을 찾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쇄신에서 멀어지는 국힘에 대한 비판도 별로 의미가 없다. 야당의 이런 모습에 여당 역시 강경해 지고, 야당은 더욱 당내 강성세력이 명분을 얻는 악순환이 한국정치의 구조다.
국힘이 쇄신에서 멀어질수록 여야의 불균형은 심화될 것이다. 여야의 정당지지도는 현저히 벌어지는 추세다. 이러한 불비례가 다시 정치 양극화의 강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정치 양극화에 의한 지지가 언제까지나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다. 국힘은 지금이라도 ‘탄핵의 강’을 벗어나서 진정한 개혁 보수의 길을 가지 않으면 영남 조차 위험하다는 사실을 언제나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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