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 政評] 통합과 화합을 넘어, 정치의 복원을 말하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선을 통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통합’과 ‘화합’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단어들이다. 문제는, 이 단어들이 ‘아름답기’만 할 뿐, 과연 우리 사회, 아니 전 세계 어디에 이처럼 통합되거나 화합된 사회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모든 국가, 모든 사회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들이 존재하는 한, ‘화합’ 혹은 ‘통합’이라는 단어는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도달 가능한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통합’이나 ‘화합’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정치를 복원하는 일이다.
21대 국회 후반기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정치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정치는 갈등의 수위를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장치다. 사회에서는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방치하면 갈등 당사자들은 무한한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사회는 심각하게 불안정해지고, 이러한 불안정은 자연스럽게 국가 시스템으로 전이된다. 이렇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에는 반드시 국가가 개입해 조정해야 하며,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정치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국회나 의회라는 ‘링’ 위에 올려 대신 싸워주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정치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치는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싸움의 규칙’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규칙에 따라 대신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며, 결국 무한 투쟁이 타협과 협상이 가능한 싸움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뜻한다.
둘째, 이러한 이유로 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가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적 갈등을 사회로 전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정치권이 스스로 무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가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정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정치적 갈등이 사회로 확산되면, 사회 전반에서 이념을 둘러싼 무한 투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정치에서 이념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정치에서의 이념이란, 권력을 잡기 위한 하나의 ‘명분’이자 ‘수단’에 불과하다. 이는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을 앞세우는 정치집단도 일단 정권을 잡고 나면, 이념보다는 정권 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잘 모르는 많은 국민들은 정권을 잡은 정치집단을 특정 이념의 화신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이념 성향과 그 집단의 이념 성향을 동일시하며 그 지도자를 추종한다.
그러나 정치인을 추종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입장에서 정치인은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선거에서 이겨야 하고,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국민에게 잘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하는 척을 하지만, 실상은 국민을 권력 쟁취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이익 실현을 위해 정치인을 이용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정치와 유권자가 서로를 이용하려 할 때 비로소 정치는 제 기능을 발휘하며, 우리의 이익이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에서 국민은 정치권에 정치의 복원을 요구해야 한다. 정치가 회복되어야만, 국민이 정치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다시금 존재감을 회복하려면,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을 동시에 보유한 민주당이 국민의힘을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국민의힘이 아무리 소수 야당으로 전락했더라도,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상과 타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 점은 새로 출범할 이재명 정부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다행히도 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대법관 수를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과 관련해 “전체회의는 조금 더 숙려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통령 취임선서 날 국회의장, 정당 대표들, 대통령과 오찬을 했을 때 국민의힘과 개혁신당 대표들이 사법개혁과 관련한 의견을 제시했다”라면서, “그런 점들이 고려되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소위원회에서 대법관 증원 법안이 통과됐지만, 전체회의는 숙려를 더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발언은 과거 22대 국회 전반기에 사라졌던 정치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사라졌던 정치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이러한 바람을 갖는 것은 국민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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