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칼럼] 섬뜩한 말들, 내전의 서막?

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2025-03-27     news
이궁 전 CJB청주방송 대표이사

말은 소리가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것이다. 즉, 소리-음이 기호화돼 뜻을 가진 것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란 쉽게 얘기해서 ‘말이 안되는 소리’란 뜻이다. 그 ‘말도 안되는 소리’들이 난무하고 있다. 말을 보면 사람을 안다고 했던가. 계엄 이후 사람들의 진면목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인격, 정신세계, 가치관, 정의감 혹은 도덕까지. 어설픈 말 몇 마디로 ‘대중’을 현혹하고 가시있는 소리들로 세상을 협박하고 있다. 무뇌 수준의 ‘국개의원’이 있고 법꾸라지가 있으며 사이비 종교인도 있다. 곡학아세하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인이 있고 진영의 노예가 된 채 정의를 외면하는 판관도 있다. 저들이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단 말인가.

어쩌다, 아니 언제부터 이 나라가 이토록 정신이 천박한 나라가 됐는가. 외국으로 이민가겠다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아스팔트 위의 저 무지몽매(無知蒙昧)는 또 어찌할 것인가. 절망에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오죽하면 땅 설고 물 설은 외국 이민을 생각하겠는가.

결국 있어서는 안 될 일이 터졌다. 테러의 시작이다. 지난 20일 헌재 앞에서 탄핵 촉구 기자회견을 하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계란을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석열 탄핵 심판이 늦어지면서 헌법재판소 부근의 혼란과 긴장이 거의 내전 수준으로 격화한 것이다. 경찰은 헌재 앞에 진을 친 윤석열 지지자와 유튜버 등 수십 명을 강제 해산했다.

보도에 따르면, 민주당 의원 백혜련과 이건태는 이날 헌재 앞에서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다가 건너편 인도에서 날아온 날계란을 맞았다. 인도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윤석열 지지자들이 있었다. 계란 외에 바나나도 여러 개 던져진 것으로 전해졌다.

현장에서 계란 등을 던진 사람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경찰은 곧바로 수사전담팀을 꾸려 수사에 나섰다.

‘중우정치’(衆愚政治), 선동과 군중 심리로 인해 다수가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민주주의의 단점을 부각시킨 말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이를 다수의 폭민(暴民)이 이끄는 정치, 폭민정치(mobocracy)라고 규정했다.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변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토론과 상호 설득을 전제로 한 다수결이 이뤄져야 한다. ‘사회계약’인 이 다수결의 원칙이 무너지면 무법천지, 무정부 상태가 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거리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이젠 누가 누구를 나무랄 단계를 벗어났다. 이런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의회독재’라는 해괴한 말을 동원해 민의(民意)를 왜곡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세력이다. 바로 ‘소수의 반란’이다.

무슨 교회 목사라는 전모는 17일 경기 수원시에서 이른바 ‘전국총연합 자유마을대회’라는 집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윤석열과 12·3 비상계엄을 옹호하면서 ‘윤 대통령 탄핵 반대’ 등을 외쳤다. 그는 “국민저항권이 헌법 위에 있다는 것은 윤 대통령이 가르쳐준 것”이라고 하면서 “4·19 혁명처럼 국민저항권을 밀고 나가서 국가를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4·19를 어디에 가져다 붙이는가. 영령들이 통곡할 말씀이다.

집회 참가자들 중에선 이 사람을 ‘선지자’라고 부르면서 “탄핵이 기각되든 인용되든 저항권은 발동될 것이다. 국민저항권이 발동되면 누군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싸움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 나라가 소위 ‘지하드’를 펼치고 있는 이슬람 국가가 된 느낌이다. “저항권으로 죽게 되더라도 순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있는 죽음”이라는 말이 날카롭게 귀에 꽂힌다.

나경원은 지난 15일 경북 구미 세이브코리아 국가비상기도회에서 “민주당의 거짓 내란 선동의 둑이 무너지고 있다. 대통령 구속이 취소됐다”면서 공수처의 불법 수사가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란죄를 범한 것이 누구냐고 묻고 이재명의 민주당이야말로 내란수괴범 아니냐면서 만약 헌재가 잘못된 판결을 내린다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심장은 멈춰버릴 것이라고 외쳤다.

나경원은 “여러분들의 행동이 대한민국을 바꿀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힘을 모아주십시오. 끝까지 함께 행동합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내란을 일으킨 자들을 옹호하고 떠받들자는 선동이다. 명색이 판사 출신에 5선 의원이다. 판사 시절에도 이런 논리와 철학으로 판결을 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서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를 읽을 수 없는 것은 비극이다.

같은 당 의원이고, 같은 판사 출신인 장동혁의 발언도 기가 막힌다. “헌재는 내란 몰이만 믿고 날뛰다가 황소 발에 밟혀 죽는 개구락지 신세가 됐다”고 했다. 또 “헌재 판결이 늦춰지자 민주당이 발작하고 있다”는 등 그의 발언은 ‘이상한’ 말투라고 밖에 달리 설명하기가 거북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를 좋게 봤던 사람들의 실망이 크다.

국힘 초선 김상욱의 시선이 형형하다. 그 자신 법조인인 김상욱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탄핵이 기각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면서 “원죄 정당의 정권 재창출은 맞지 않다”고 했다. 나(羅)모의 주장과는 대척점에 있는 판단이다.

“헌법재판관이 만약 기각 판결문을 쓴다면 대한민국은 망한다. 국민은 받아들일 수 없고, 상식을 가진 국민은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다. 수백만 군중이 나오면 경찰이 막을 수 없고, 그때는 ‘준전시 상태’라고 계엄을 선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계엄군과 반란군 간에 충돌이 생기고, 계엄군과 시민들 간 충돌이 일어나 내전 상태가 된다. ‘제2의 시리아’처럼 될까봐 걱정이다.”

사실여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김건희는 윤석열의 체포를 막지 못한 경호관들에게 “총 가지고 있으면 뭐 하냐. 이런데 쓰라고 있는 건데. 이재명을 쏘고 나도 자결하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직무유기 현행범은 국민 누구나 체포할 수 있다. 헌법을 무시하고 있는 최상목은 몸조심하라”라고 했다는 이재명의 발언과 함께 여야 공방의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 섬뜩한 말들이다.

최근 코미디언 이경규의 어록이 화제가 됐다. 방송계에서 깨달은 삶의 원칙이라는 그의 얘기.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

2일 유튜브 채널 <지식인사이드>에 출연한 이경규는 “꼭 책을 많이 안 읽고 공부을 잘 안해서 무식하다는 게 아니다”면서 “특정 분야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명하신 현학자(衒學者)들 얘기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윤석열 집권이후 우리는 자기만 옳다면서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 문법에 물들었다. 보수나 진보라 하지만 피차 이렇다 할 차이도 없는데 진영싸움을 하고 있고, 같은 지역에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굳이 내편 네편을 가르고 서로를 백안시하고 있다. 역사의식과 정의감을 가져야 할 ‘엘리트’들이 같은 수준이라는 게 절망스럽다. 누가 중심을 잡아줄 것인가.

윤석열 탄핵재판이 인민재판 형식으로 흐르면서 대한민국은 사실상 두 쪽이 났다. 헌재 재판관들의 책임이 크다. 오죽하면 대통령 파면 문제는 헌재 판결이 아니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주장이 다 나오겠는가. 적당히 무시하면 괜찮은 것이 헌법이냐는 조롱도 있다. 헌법재판관들은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윤의 탄핵재판을 하루빨리 종결해야 한다. 국민을 배신하는, 진영의 노예가 돼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간을 끈다는 게 비정상이다.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양극화 구조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에서도 고민거리였다. 2004년 버럭 오바마는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연설을 했다. 결국 그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든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

“우리는 나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나뉠 수 있을 뿐이다. 양쪽으로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피해자이고, 우리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만든 결과물이다”

‘분노에 찬 막다른 골목’, 내전 일보 직전에 있는 우리가 곱씹고, 또 곱씹어 봐야 할 말, 편견과 차별, 진영을 넘어 오직 ‘의로움’에 목말랐던 오바마의 외침을 패러디해 보자.

“진보주의 대한민국도, 보수주의 대한민국도 없습니다. 그저 대한민국만 있을 뿐입니다”

<외부 필자의 기고와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