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 없는 그린피 [한종해의 온탕냉탕]
폭염에 타버린 잔디…‘그린’ 없는데 ‘그린피’ 더 올랐다 잔디 관리 부실로 메이저대회 프리퍼드 라이 룰 적용 ‘망신’
“내가 골프를 치러 왔는지, 밭을 매러 왔는지 모르겠다. 잔디가 이렇다면 요금을 할인해야 하는거 아닌가. 배짱 장사가 도를 넘었다.”
지난 주말 경기도 여주의 명문 골프장에 다녀온 A씨의 이용 후기다. 빚을 내서라도 치러 간다는 가을 골프였지만 실망뿐이었다. 몇몇 골프장 방문 후기를 찾아보니 비단 A씨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범인은 기후변화, 공범은 양심없는 골프장이었다. 올해 여름은 골프장에 있어서 특히 악몽이었다. 지난 6~8월 평균기온은 25.6도로 1973년 기상 관측 이후 가장 높았고, 시간당 100mm가 넘는 폭우가 아홉 번이나 쏟아졌다. 열대야도 20.2일로 역대 가장 길었다.
높은 기온과 폭우, 그리고 열대야는 양잔디로 불리는 한지형 잔디에 치명적이었다. 한지형 잔디의 대표 품종은 켄터키블루그래스와 벤티그래스다. 잎이 얇고 부드러워 푹신하고, 추위에 강해 사시사철 푸르다. 문제는 더위다. 이들은 생육 적정 온도는 15~20도, 28도가 넘으면 성장이 중단된다.
올해 여름. 한지형 잔디는 살아남지 못했다. 밤에도 고온이 이어지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잔디 밑으로 스며든 물이 더위 때문에 데워지면서 잔디 뿌리가 익혀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 지난 9월 초 블랙스톤이천GC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KB금융 스타챔피언십과, 같은 기간 클럽72 오션코스에서 치러진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신한동해오픈 등 메이저대회 역시 좋지 않은 코스 상태 때문에 프리퍼드 라이 룰이 적용되기도 했다. 프리퍼드 라이는 페어웨이 상태가 나쁠 때 적용되는 로컬룰로, 벌타 없이 볼이 집어 닦은 뒤 근처에 옮겨 놓고 치는 것을 말한다.
상황이 악화되자 일부 골프장들은 새로운 대책 마련에 나섰다. 포천 몽베르CC와 제주 부영CC, 더시에나CC, 대부도 더헤븐CC 등이 잔디를 고온다습에 강한 난지형 잔디로 교체했고, 대회 당시 잔디 상태 지적을 받은 블랙스톤이천GC는 잔디 교체 검토에 들어갔다. 난지형 잔디에 한지형 잔디를 덧파종하는 골프장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품종 교체를 했거나 검토 중인 골프장은 양반축에 속한다. 문제는 ‘그린’ 없는 구장에서 할인 없는 ‘그린피’를 받고 있는 양심없는 골프장들이다. 페어웨이나 그린 곳곳이 맨땅을 드러내고, 티잉 그라운드에 잔디가 모두 벗겨서 18홀 전홀 티샷을 매트에서 진행하게 하면서도 사전 공지 없이 요금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몇몇 골프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관리는 엉망인데, 그린피를 할인하지 않거나, 오히려 가격을 올린 골프장 리스트가 퍼지고 있을 정도다.
엔데믹 이후 해외여행 열풍과 비교적 저렴한 가격을 무기 삼은 해외 골프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오는 8일부터는 한국인의 중국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지면서 국내 골퍼들의 해외 이탈은 가속화 할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국내 골프 산업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글로벌 마켓 인텔리전스 기업 GfK에 따르면 2023년 오프라인 골프클럽 시장은 7000억원 규모로 2022년 대비 10% 감소했으며, 한국레저산업연구소가 발간한 ‘레저백서 2024’에 따르면, 골프용품 수입액도 지난해 7억2840만 달러(한화 약 1조88억원)로 2022년보다 17.0%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내장객도 줄었다. 지난해 국내 골프장 내장객은 2022년과 비교해 5.7% 감소했고, 올해 역시 5% 내외 감소를 나타내고 있다.
그린피(GreenFee)의 대부분은 말 그대로 잔디 요금이다. 그린피로 돈을 벌었다면 최소한 일부라도 코스에 투자해 ‘그린’을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국내 골프장이 지금처럼 수익에만 집중하고 관리는 외면한다면 국내 골프산업의 다운사이클은 가속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