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밥그릇 쟁탈전’ [한종해의 재계 포커스]
75년 동지에서 철천지 원수로…고소·고발 흠집내기
‘아름다운 이별’은 없었다. 75년 동안 동업을 이어온 고려아연과 영풍이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이어져 온 동업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 기업인 고려아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자가 1949년 함께 창업한 ‘영풍기업사’가 나온다. 두 창업주 일가는 75년간 동업자 관계를 이어왔으며 1974년 고려아연 창립 뒤 영풍과 전자계열은 장씨 일가가, 고려아연 및 여타 계열사는 최씨 일가가 경영해왔다. 이는 창업주 2세인 장형진 영풍 고문과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 대에도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균열은 2017년 지배구조에 변화가 생기면서 시작됐다. 정부의 순환출자 규제 강화로, 영풍그룹과 고려아연도 복잡한 지배구조를 개편해야 했다. 특히 문제로 지목된 것은 ‘고려아연→서린상사→㈜영풍→고려아연’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였다.
결국 장씨 2세 경영인이자 단일 최대주주인 장형진 영풍 고문이 2019년 서린상사가 보유한 ㈜영풍 지분 10%를 직접 취득하는 방식으로 해당 순활출자 고리를 끊었다.
장씨는 ‘장형진→㈜영풍→고려아연’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확고히 하게 됐다. 문제는 최씨였다. 서린상사를 통해 지주회사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다고 장씨가 고려아연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아니었다. 장씨와 ㈜영풍의 고려아연 지분은 33.14%로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하기에 부족했다. 소유는 장씨가, 실질적 경영은 최씨가 맡는 ‘불편한 동행’의 시작이었다.
‘헤어질 결심’은 2019년 3월부터 대표이사를 맡아온 창업주 손자 최윤범 회장이 2022년 고려아연 회장에 오르면서 본격화됐다.
최 회장은 2차전지 소재·신재생 에너지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고, 이 과정에서 현대차와 한화·LG 등 외부와 손을 잡기도 했다. 최 회장은 제3자 유상증자, 자사주 교환 등을 통해 지분율 높이기에 나섰다.
고려아연은 2022년 8월 한화그룹 미국 계열사인 한화H2에너지USA를 대상으로 제3자 유상증자를 단행해 우호세력을 확보했다. 당시 한화H2에너지USA는 4717억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지난해에는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가 공동 설립한 해외 법인 HMG글로벌을 상대로 5272억원 규모의 신주(5%)를 발행하기도 했다.
고려아연은 자사주 1.2%를 한화그룹 지주사인 한화 자사주 7.3%와 교환하고, LG화학에도 자사주 1.97%를 넘기고 이 회사 자사주 0.47%를 받는 등 자사주도 우군 확보에 활용했다. 또 글로벌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트라피구라(1.5%)와 한국투자증권(0.8%), 모건스탠리(0.5%) 등에 자사주를 매각하기도 했다. 자사주가 타사로 넘어가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15.61%에 불과했던 최씨 일가가 우호지분의 힘으로 장씨 일가와 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씨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코리아서키트, 테라닉스, 에이치씨 등 지배력을 가진 영풍그룹 계열사를 총 동원해 고려아연 지분 확대에 나섰다. 하지만 지분율 격차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장씨 측은 지난 13일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약 2조원을 투입해 고려아연 지분 약 7~14.6%를 공개매수하겠다고 기습 발표했다. 이후 공개매수가를 기존 주당 66만원에서 주당 75만원으로 인상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최씨 측은 대항공개매수를 통해 지분 확보를 추진 중이다. 고려아연 공개매수 종료일은 6일. 이날 장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운명의 시간’은 4일 오후 3시30분까지다.
결론이 어떻든지 원만하고 지혜로운 결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 경영진에 대한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는 만큼 공개매수 이후에도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한 진흙탕 싸움이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파이낸셜투데이 한종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