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북한이 미국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와 소위 리비아 방식의 핵포기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양측 간 ‘의제 싸움’이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16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보도된 담화에서 “볼턴을 비롯한 백악관과 국무성(국무부)의 고위 관리들은 ‘선 핵포기, 후 보상’ 방식을 내돌리면서 그 무슨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니,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니, ‘핵, 미사일, 생화학 무기의 완전폐기’니 하는 주장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고 있다”며 “격분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핵심 의제에 대한 북측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미 당국자들이 그간 여러 계기에 주장해온 비핵화 방식들에 ‘수용 불가’를 명확히 한 것이다.

우선 김 제1부상은 담화에서 볼턴 보좌관 등이 거론해온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의 성격을 ‘선(先)핵폐기’와 ‘후(後)보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비쳤다.

볼턴 보좌관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어떤 양보든 하기 전에 북한이 핵무기와 핵연료, 미사일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나는 그것이 비핵화의 의미라고 생각한다”면서 “우리는 2003년, 2004년 리비아 모델에 대해 많이 염두에 두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앞서 13일(현지시간) 볼턴 보좌관은 ABC 방송 인터뷰에서도 ‘반드시 PVID(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이행돼야 하느냐’는 질문에 “맞다. 그것이 보상 혜택이 흘러들어 가기 시작하기 전에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구체적인 보상을 하기에 앞서 북한이 비핵화 관련 조처를 해야 한다는 식의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두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서도 ‘단계적·동시적 조치’를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 어느 한쪽이 일방적 선행조치를 취하는 식으로 이행의 ‘판’이 짜이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핵개발 초기이던 리비아와 달리 북한의 핵능력은 이미 완성 단계에 올라선 만큼, 미국과 대등한 ‘전략국가’ 위치에서 이행조치를 교환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인식도 깔렸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관지인 조선신보는 이달 15일 “미국이 흔히 쓰는 성구의 일부를 인용한다면 조선(북한)의 요구는 ‘적대시정책과 핵전쟁 위협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포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날 담화에서 김 제1부상이 “미국의 대조선(대북) 적대시 정책과 핵위협 공갈을 끝장내는 것”이 한반도 비핵화의 ‘선결조건’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행 과정의 일정 단계에서 미국의 상응하는 보상 조치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김 제1부상이 ‘선결조건’을 언급한 배경에 대해 “미국이 제공하겠다는 체제안전 보장은 비핵화 완료시 제공되는 것”이라며 “비핵화가 시작돼 마무리될 때까지의 과도기적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이 명확히 답을 주지 않았을 수 있다”고 관측했다.

김 제1부상은 미국이 거론하는 강력한 비핵화 목표인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앞서 백악관은 10일(현지시간) 북한에 장기 억류됐던 미국인 억류자 3명의 귀환 조치와 관련한 보도자료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CVID 목표 달성을 위해 미 행정부가 이미 이룩한 상당한 진전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비핵화의 ‘범위’라고 할 수 있는 ‘완전한’(complete) 비핵화를 지난달 27일 판문점 선언에 명시한 바 있지만, ‘검증 가능한’(verifiable),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구체적 비핵화 ‘방식’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한이 궁극적 비핵화 목표로서의 ‘CVID’ 개념 자체를 배격한다기보다는 검증 방식이나 폐기의 불가역성 등 구체적인 비핵화 이행의 쟁점을 놓고 북미 간에 이견이 빚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볼턴 보좌관은 ABC 방송 인터뷰에서 “우리는 탄도미사일 의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화학·생물학 무기도 살펴봐야 한다”며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전체를 북미정상회담 의제로 삼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김 제1부상이 ‘핵, 미사일, 생화학 무기의 완전폐기니 하는 주장…’이라고 담화에서 거론한 대목은 최근 미측이 핵폐기 대상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이런 의제 확대 시도를 거부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며, 볼턴 보좌관이 언급해 온 우라늄 농축·플루토늄 재처리 등 ‘핵연료주기 제거’에 대해서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내세우며 전면 수용은 거부할 우려가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은 김계관 제1부상 자신이 6자회담 수석대표로서 참여했던 2005년 9·19 공동성명의 도출 과정에서도 한·미에 경수로 제공을 요구하면서 포기 대상을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으로 한다는 선에서만 합의했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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