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로 일어나고 로비로 쓰러졌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대입 논술에 많이 등장하는 논제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희소병에 걸렸다고 가정해보자. 아이를 살리려면 당장 3000만원의 수술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부모는 돈이 없다. 그래서 다른 아이를 유괴해 돈을 마련하여 자기 아이를 살렸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목적’을 위해 유괴라는 ‘수단’을 쓴 것이다. 물론 정당한 수단은 아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기업가가 있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다. 그의 한보그룹은 ‘로비’로 성장해 ‘로비’로 무너졌다.

▲은마타운 신화의 주인공

“As things get tough, S Korea’s bosses get rolling(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한국의 재벌 총수들은 휠체어를 탄다.)” 영국의 경제신문 <파이낸셜 타임스>의 2007년 9월 12일 자 기사 제목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사례를 들면서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총수들은 검찰 수사를 받지 않거나 형 집행이 연기됐다”고 지적했다. 외국에까지 소개될 정도로 우리나라 재벌 총수들의 ‘휠체어 사랑’은 각별하다. 멀쩡한 모습으로 법정에 들어서면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아예 바퀴 달린 병원 침대에 누워 등장하는 재벌 총수도 있다.

모든 일에는 원조가 있기 마련. 휠체어 패션의 원조는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다. 정 전 회장은 5년 5개월을 복역하다가 고혈압, 협심증의 병세로 석방됐다. 당시 정 전 회장의 법정 출두 패션은 이후 재벌 총수들 사이에서 대유행하게 되었다. 벙거지 모자와 마스크, 그 사이로 드러난 깎지 않은 수염, 오른팔에 꽂은 링거, 애처로운 그의 모습은 ‘휠체어 재판’의 원조가 됐다.

한보그룹은 정 전 회장과 성장·추락을 함께했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빈농인 부친 정용석 씨와 모친 황맹옥 씨의 1남 1녀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정 전 회장은 26세가 되던 1949년 첫 번째 부인인 김순자 씨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 세무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부산·경남 지역 일선 세무서에서 하위직인 주사보로 일하다가 김 씨 사망 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만난 사람이 한보그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보상사를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둘째 부인 이수정 씨다. 이 씨와 결혼한 정 전 회장은 1970년대 초 일제 시절 폐광이 된 강원도의 몰리브덴광산을 사들여 1974년 이를 수출하는 한보상사를 설립했다.

몰리브덴 수출이 성과를 이루자 정 전 회장은 주택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1975년 정 전 회장은 한보주택의 모태가 된 서울 구로동 영화아파트 172가구를 건립하면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정 전 회장은 강남구 대치동의 쓸모없는 유수부지 7만여평을 매입해 당시 단일 물량으로 최대 규모였던 2200세대를 은마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분양했고 2400세대를 추가 분양하면서 큰돈을 만지게 됐다.

당시 부인 이 씨는 건설 현장에서 일꾼들의 새참을 나르고 자금을 구하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닐 정도로 남편 이상으로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이 씨는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회사 일을 챙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전 회장은 1983년 이 씨가 암으로 타계하자 경기도 김포의 부인 묘소를 6개월에 걸쳐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했다.

정 전 회장은 은마타운 성공분양의 여세를 몰아 19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 한보종합건설로 상호를 변경하고 해외 건설에 뛰어들었다. 이후 주택, 상사, 종합 건설, 목재, 탄광, 상가 등으로 계열기업을 확장했고 골프장뿐만 아니라 은행관리업체였던 태화방직을 인수했다.

▲IMF의 신호탄, 한보철강

이 씨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84년 정 전 회장은 금호철강을 인수하며 훗날 IMF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한보철강을 설립했다. 한보그룹의 재계 순위는 30위권으로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1986년을 기점으로 한보그룹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철강을 제외한 대부분의 업종에서 적자를 기록했고 재무 구조는 걷잡을 수 없이 취약해져 갔다. 정 전 회장은 감량 경영과 계열사 처분 및 합병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돈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강남구 수서-대치 지역의 개발 제한 구역 땅을 사들인 정 전 회장은 ‘통 큰’ 로비를 벌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이 예상하는 액수에 0 하나를 더 붙여 정관계 인사들에게 전달했고 해당 땅을 택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강남의 마지막 노른자위 땅으로 분류되던 수서-대치 지역 공공용지 3만5500평에 건축 허가가 난 것이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진=뉴시스

애초 수서-대치 택지 공급권을 갖고 있던 서울시는 수서 택지 공급을 요구하는 26개 연합 주택조합과 시공사인 한보주택에게 “특별 공급은 불가하다”는 방침을 이어왔다. 그런데 1991년 1월 21일 운백영 당시 서울시 부시장이 전격적으로 특별 공급 허가를 발표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특별 분양을 받은 26개 연합 주택조합에 경제기획원, 서울지방국세청, 군부대, 언론사 등 영향력 있는 다수 기관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특혜 의혹이 일어났다. 그리고 1991년 2월 3일 청과대와 정치권의 힘이 작용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서울시, 건설부, 정치권에 있던 수많은 공직자들이 옷을 벗었고 정 전 회장도 뇌물공여죄로 구속됐다. 당시 서울시장이던 고건 전 총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특정 업자에게 특혜분양을 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경질됐을 정도로 정 전 회장 로비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정 전 회장은 한보철강을 통해 엄청난 추가 금융 지원을 받으며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한보철강은 아산만에 새 공장을 건설하는 등 철강 호황기를 만나 급성장했다. 1995년 기준 한보그룹 재계 순위는 24위였다.

하지만 당진 제철소가 문제였다. 초기 2조2800억원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제철소 건립 투자금은 2년 만에 5조7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정부와 채권 은행단이 한보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투자비를 계속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한보그룹은 18개의 회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하는 일을 벌였다. 1995년 11월 기준 한보그룹 계열사는 26개였다.

결국 외부차입금이 5조원에 이를 정도로 취약한 재무 구조 때문에 제철소 완공 이후에도 적자경영이 불가피할 것으로 뒤늦게 판단한 금융기관이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1997년 1월 한보는 최종 부도 처리됐다. 이는 대한민국 IMF 관리체계를 향한 첫발로 기록된다. 1997년 4월 삼미그룹, 진로그룹이 부도 유예에 들어갔고 5월 대동주택이, 7월 기아그룹 등 연쇄 부도가 발생했다.

▲못 잡는 거야? 안 잡는 거야?

한보그룹 부도 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 부정 사건으로 꼽히는 한보 사태가 터졌다. 정 전 회장과 정관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한 이 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다.

한보철강 당진공장.

한보 사태의 핵심은 당진 제철소 프로젝트에 있었다. 한보그룹이 당진 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할 당시 건설부는 부지매립 허가를 9개월 만에 내주고 통상산업부(산업자원부)는 검증도 되지 않은 코렉스 공법의 채택을 적극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견제는 없었다.

코렉스 공법은 철광석과 유연탄을 1차 가공하고 용광로에 함께 넣어 쇳물을 만드는 용광로 공법과는 달리 값이 싼 저급 일반탄을 가공 없이 용광로에 넣어 쇳물을 생산하는 공법이다. 환경 친화적이고 투자비가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 공법이 국내에서 인정 받은 것은 2002년에 들어서면서부터다.

1997년 5월 한보 사태로 인해 정 전 회장은 공금 횡령 및 뇌물 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은 징역 5∼20년을 선고받았다. 국회에서는 한보 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됐고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여당의 황병태 의원,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뿐 아니라 야당의 정대철, 권노갑 의원을 비롯해 김우석 내무부장관, 문정수 부산시장 등이 대출 관련 청탁 또는 국정감사 선처 청탁 등으로 뇌물 수수에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에 따라 대거 철창신세를 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도 구속됐다.

이후 정 전 회장에게는 ‘비리 백화점’ ‘로비의 귀재’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정 전 회장은 이후 2005년 강릉영동대학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2심 재판 도중인 2007년 신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현재까지 해외 도피 중이다. 도피 11년째 못 잡는 건지 안 잡는 건지 모를 일이다.

▲콩 심은 데 콩 났고 팥 심은 데 팥 났다

정 전 회장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끊임없는 부정 행위로 법정에 선 것이다. 먼저 장남 종근 씨는 대성목재 회장으로 있던 1996년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그룹 계열사 세 곳에 우량 어음을 넘겨주고 계열사 어음을 받는 방법으로 모두 224억원을 불법 지원하다 2002년 불구속 기소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차남 원근 씨는 한보그룹이 자금난에 시달리던 1996년 6월 경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거액의 도박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및 벌금 500만원과 함께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받았다.

삼남 보근 씨와 그의 아내 김 모 씨는 정 전 회장이 1980년대 설립한 학교법인 정수학원이 운영하는 강릉영동대학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려왔다. 정 전 회장은 해외 도피를 하면서 간호사 4명을 고용했으나 급여를 주지 못하게 되자 며느리가 학장으로 재직하던 강원영동대학의 교비로 이를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김 씨는 이들 네 명을 학교 교직원으로 허위 채용해 4000여만원의 급여를 지급했다. 또 대학의 해외 학생 유치 센터를 이용해 정 전 회장의 도피 자금을 빼돌리기도 했다. 김 씨는 카자흐스탄 등지에 해외 학생 유치 지사를 만들어 운영비 명목으로 빼돌린 돈 1억3000여만원을 정 전 회장에게 전달했다.

2007년 감사에서 교육부는 교비 2억여원이 정 전 회장의 해외 도피 자금으로 빠져나간 사실을 적발했다. 이에 김 씨는 다시 학교법인 소유 2억여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를 은행에 맡기고 대출받은 돈을 횡령해 교비를 반환했다. 횡령금으로 횡령금을 막은 것이다. 보근 씨는 아내와 함께 학교 운영비를 횡령하고 자신의 개인 사무를 수행하던 두 명을 교직원인 양 위장해 교비로 임금 2200만원을 횡령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보근 씨는 정 전 회장과 함께 고액·상습 체납자 상위 명단에 매해 오르고 있기도 하다. 국세청이 공개한 체납 명단을 보면 정 전 회장이 누적 체납액 2225억원으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보근씨는 645억원의 체납액을 기록, 715억원의 세금을 체납한 조동만 한솔 부회장의 뒤를 이어 5위를 차지하고 있다.

사남 한근 씨는 1997년 동아시아가스를 세운 뒤 회사 돈 320억원을 스위스의 한 은행 계좌로 빼돌린 혐의로 검찰의 추적을 받자 1998년부터 20년 동안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다.

한보그룹의 한 전직 임원에 따르면 정 전 회장은 아직도 재기를 꿈꾸고 있다. 9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건강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밑천은 동아시아가스와 보광특수산업이다. 숨겨놓은 ‘땅’도 많다. 정 전 회장이 보유한 땅은 용인, 인천, 안산 등 수도권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국세청이 적발한 땅만 해도 시가 1500억원을 넘는다.

서울 송파구 장지동 357 일대 땅이 대표적이다. 시가 1000억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땅은 국세청이 즉각 압류했다. 국세청은 정 전 회장이 30년 동안 미등기 상태로 숨겨놓은 180억원 상당의 부동산도 찾아 등기 촉탁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 강남에 300억원대의 땅을 숨겨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기도 했다. 또 다른 은닉 재산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머슴이 뭘 알겠는가?” 정 전 회장이 IMF가 터지기 몇 달 전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 한 이 말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들을 한순간에 머슴으로 격하시켰다. 한보그룹에서 일하던 모든 직원들이 머슴이라는 오너의 생각. 어쩌면 이러한 그의 사고방식 속에 이미 한보그룹의 실패가 내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보그룹은?>

1974년 한보상사 설립
1979년 은마아파트 분양, 초석건설(한보종합건설) 인수
1984년 금호철강(한보철강) 인수
1991년 수서비리 사태
1995년 당진 제철소 건립 추진
1997년 그룹 부도, 한보사태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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