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망해도 가장 활발한 회장님

 

서울숲과 한강 경계선에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접근 자체가 쉽지 않으며 강변북로 진출입로 사이에 위치해 차량 통행이 빈번하고 횡당보도나 보행자 신호등 같은 안전시설도 없다. 위령비 주차장도 화단으로 막혀 자칫하다가는 진입로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사진=한종해 기자
인류 역사상 최대 토목공사로 불리며 사막을 옥토로 바꾼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이끈 회장님. 하지만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그리고 끊임없는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 등 ‘불량총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회장님. 돈이 없다는 이유로 고액의 세금은 체납하고 있으면서 영화를 제작하고 골프장 회원권을 상속하고 공금을 빼돌리는 회장님. 회사는 공중분해됐지만 최 전 회장이 망한 총수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사막을 옥토로 바꾸다

물보다 기름이 많은 나라, 전 국토의 90%가 사막 등 불모지인 나라, 일 년에 비가 한두 번 올까 말까 하는 ‘물 제로’의 나라 리비아. 이 나라의 유일한 희망은 남부 사막지대 아래서 발견된 엄청난 규모의 지하수뿐. 지하수를 수도 트리폴리나 벵가지까지 끌어 올릴 수만 있다면 생활용수는 물론 농업·공업용수 문제까지 말끔히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기술력이었는데, 카다피는 ‘녹색혁명’을 발표하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추진키로 했다. 이 인류 최대의 토목 공사에 나선 기업이 우리나라의 동아건설이다. 동아건설은 지름 4m의 수도관으로 650km를 달려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 물을 공급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당시 한 언론은 성공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1996년 9월 1일 오후 4시 리비아 수도 프리폴리. 카다피 리비아 국가 지도자가 수도꼭지를 틀자 콸콸 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맑고 시원한 물이었다. 트리폴리 남쪽 650km 떨어진 자발 하소나의 지하 480m에서 퍼올린 암반수였다. 이날 통수식에 참석한 카다피 등 세계 30여 개국 국가 원수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통신장교였던 카다피가 1969년 ‘녹색혁명’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쿠데타로 집권한 지 27년 만에 자신의 공약을 실현하는 순간이었다.”

카다피는 곁에 서 있던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손을 번쩍 쳐들며 “대수로 공사를 차질 없이 시공해준 한국 기업에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 했다. 하지만 그 기업은 이제 없다. 200억 달러 규모를 자랑하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했던 동아건설은 공중분해 됐다.

해외에서는 잘나갔지만 국내 시장을 외면한 게 결정적 이유였다.

▲한때는 세계 제일을 다투던 건설사 회장님

동아그룹은 고 최준문 창업주가 1945년 8월 대전에서 설립한 충남토건사를 모체로 한다. 충남토건사는 1953년 3월 대전지방의 청라저수지, 남포간척지, 대천간척지 토목 공사를 통해 기반을 굳히고 1957년 동아건설산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했다.

동아건설은 그해 본사를 대전에서 서울 중구 서소문동으로 이전했다. 1960년대 들어 동진강 간척공사, 왕십리발전소공사,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특히 제1차 경제 다목적 토목사업이었던 동진강 간척공사는 동아건설이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지렛대 역할을 했다.

그룹으로서의 골격을 형성하게 된 때는 1968년 당시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통운을 인수하면서 부터다. 정부는 대한통운을 민영화하면서 동아건설에 경영권을 맡겼다. 동아그룹은 대한통운을 토대로 건설·운송 체제로 외형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만성 적자와 경영부실의 늪에 빠져 있던 대한통운은 동아건설에 인수된 지 3년 반 만에 완전히 정상화됐으며 한국 경제 발전에 든든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동아그룹은 1973년 투자회사인 동아종합상사를 건립해 무역업에 진출하고 기업을 공개,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75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지사를 설치한 후 리야드, 지다, 뉴욕, 도쿄, 런던 등지에도 지사를 설치했다.

1966년부터 동아콘크리트 사장으로 경영 수업을 받던 최 창업주의 장남 원석 씨는 1977년 건강 악화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아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최 전 회장은 1980년대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사로 평가받던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했다. 최 전 회장은 1983년 39억 달러 규모의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를 따내면서 카다피 리비아 원수와 인연을 맺은 뒤 공사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1990년 62억 달러 규모의 2단계 공사, 1998년 51억 달러 규모의 3단계 공사까지 따냈다. 동아건설은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통해 현대건설과 함께 국내 최고 건설회사 반열에 올랐고 ‘인류 역사상 최대 토목공사’라는 찬사를 받음과 동시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현장.

만일 동아그룹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리비아와의 인연은 물론이거니와 동아건설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중동이라는 유력한 성장 시장에서 확고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동아그룹 해체 후인 2010년 간첩 사건으로, 리비아와 외교 문제가 불거졌을 때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행하면서 카다피와 막역한 관계를 맺었던 최 전 회장을 외교사절로 활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 정도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그룹은 1997년 12월 기준, 동아건설, 대한통운, 동아생명, 동아증권, 동아엔지니어링, 공영토건 등 22개 계열사를 둔 재계 서열 10위의 대기업 자리를 꿰찼다. 주력 기업인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의 매출은 3조원과 1조1500억원으로 매출 순위 각각 31위와 75위의 기업이었다.

▲우리나라도 좀 챙기지 그러셨어요

하지만 해외에서 잘 나간 동아그룹은 국내에서는 연일 뭇매를 맞고 있었다. 국내 다른 그룹 계열 건설사들은 아파트 건축과 그룹 자체 공사로 상당한 양의 일감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해외 공사에 주력했던 동아건설은 국내 재개발과 재건축 공사를 따내는 데 그쳤다. 신축과는 달리 이주비가 들어가는 재개발과 재건축 공사를 위해 동아건설은 제2금융권으로부터 막대한 단기자금을 차입할 수밖에 없었고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성수대교(동아건설 시공) 붕괴와 외환위기까지 맞으면서 회사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성수대교 붕괴는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의 교각 10번과 11번 사이 상판 120m 중 48m가 갑자기 한강으로 내려앉으면서 그 위를 달리던 버스 등 차량 6대가 한강에 추락한 사고다. 준공된 지 불과 15년도 안 된 성수대교의 붕괴는 ‘날림공사’가 원인이었다. 발주처 입찰 예정가격은 116억원. 하지만 동아건설은 77억2000만원에 공사를 낙찰받았다. 덤핑 수주는 부실시공으로 이어졌다. 예정가의 절반 수준에 그친 낙찰가로는 값싼 저급자재를 쓸 수밖에 없었고 이마저도 규정보다 적게 투입됐다.

결국 1998년 초 부실 경영의 책임을 지고 최 전 회장은 경영권과 700억대의 재산을 내놓으며 경영에서 물러났고, 그해 8월 동아그룹은 워크아웃 대상 기업으로 최종 확정됐다. ‘동아건설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매각해 경영을 정상화하라’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동아그룹은 2000년 11월 법정 관리 대상 기업으로 결정돼 퇴출됐다가 2001년 5월 파산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55년 역사를 자랑하던 대형 건설사는 공중분해 됐다.

▲결코 로맨틱하지 않은 회장님의 사생활

2004년 분식회계, 배임, 불법 사기 대출 등 혐의로 구속된 최 전 회장은 2008년 특별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됐지만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그리고 끊임없는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 등 ‘불량 총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 전 회장 일가는 회사가 분해된 뒤에도 남부럽지 않은 호화생활을 누려왔다. 먼저 최 전 회장은 학교법인 공산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도 회사 부도 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줄곧 세금을 체납해왔다. 2017년 말까지 최 전 회장이 체납한 세금은 5억7500만원에 이른다. 2007년에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아방송예술대학의 학내 기업이 만드는 ‘굿바이 테러리스트’라는 영화에서 총감독을 맡아 영화계에 입문하기도 했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사진=동아방송예술대학교 누리집 갈무리

 

최 전 회장은 국세청의 눈을 피해 2011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빅혼골프클럽의 회원권 환급금 25만 달러를 차남에게 양도한 바 있다. 또한 공산학원의 공급 10억원을 빼돌린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2012년 검찰은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최 전 회장을 체납처분 면탈혐의로 수사했다.

동아건설 대표이사와 예음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지낸 최 전 회장의 동생 원영 씨는 1997년 10월부터 1998년 3월까지 경원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경원대와 경원전문대 학생들이 낸 등록금 201억원을 자신이 운영하던 예음그룹 산하 계열사의 부도를 막는데 사용한 혐의로 2012년 12월 말 구속됐다. 원영 씨는 1993년 11월에 자산이 운영하던 예음문화재단 명의의 부동산을 성남교육청에 매각하고 받은 99억원 상당을 횡령한 혐의도 있다. 이와 함께 경원전문대학의 강의동 등에 대한 공사를 자신이 운영하는 동아종합환경에 발주하도록 하고 선급금 명목으로 28억원을 지급해 법인에 손해를 입힌 혐의도 있다.

원영 씨는 1998년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핵심인물인 예음그룹 종합기조실장인 장 모 씨 등을 일본으로 도피시키고 그해 12월 미국으로 도주했으나 2012년 미국 내 소재지가 노출되며 수사망이 좁혀지자 2012년 11월 28일 자진 귀국해 수사에 응했다.

원영 씨는 동아그룹 해체 전 최 전 회장과 공산학원을 둘러싸고 재산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형제의 모친인 임춘자 씨가 최 전 회장을 고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두 형제가 가까스로 화해한 것은 1997년 2월이었다.

이에 앞서 1995년에는 최 전 회장의 이복 여동생 혜숙 씨가 최 전 회장을 상대로 재산 분할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에서 혜숙 씨가 패소하면서 소송은 물거품이 됐지만 동아그룹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벌어진 두 번의 골육상잔은 채권단들이 최 씨 형제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됐다.

최 전 회장에게는 공식적으로 혼외 자식을 비롯해 전처들에게서 난 4남 2녀가 있다. 최 전 회장이 스무 살일 때 한 여배우 사이에서 낳은 딸 선희 씨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형 고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의 차남 재찬 씨와 결혼했는데, 2012년 3월 아들 준호·성호 군과 함께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1000억원대 주식 인도 청구소송을 내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초 영화배우 전도연 씨와 염문설이 불거졌던 장남 우진 씨는 최 전 회장의 첫 부인인 김혜정 씨의 소생이다. 김 씨는 19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대표적 육체파 배우로 최 전 회장은 1962년 김 씨와 결혼식을 올렸으나 결국 파경했다.

우진 씨의 여동생 유정 씨는 강수창 대원화성 명예회장의 장남 상엽 씨와 혼인을 올렸다. 대원화성은 나이키, 아디다스 등 세게 유수의 스포츠용품 업체에 인공피혁을 공급하고 벽지 제품을 생산하는 중견회사다.

1976년 최 전 회장이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은 배인순 씨는 1970년대를 풍미한 가수 펄시스터즈의 멤버다. 배 씨는 2003년 출간한 저서 ‘30년 만에 부르는 커피 한 잔’에서 최 전 회장과 결혼하기까지의 사연, 고초, 고액 위자료설 등에 대한 심경을 털어놨다. 특히 최 전 회장과 스캔들이 있었던 연예인들이 J, K, L 등의 이니셜로 등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둘 사이에는 세 명의 아들이 있으며 1998년 이혼했다.

배 씨의 첫째 아들이자 최 전 회장의 차남 은혁 씨는 2003년 6월 액상원두커피, 차, 인스턴트식품 등을 취급하는 쟈댕 윤영노 회장의 딸과 혼인했다. 윤 회장은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의 친동생이다. 은혁 씨는 최 전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공산학원에서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체납 처분 면탈 방조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올랐지만 2013년 7월 물놀이를 하다가 세상을 등졌다. 은혁 씨는 처가 식구들과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경기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 별장을 찾아 근처 홍천강에서 수영을 하던 중 물에 빠졌고 119 구조요원에 의해 구조되어 인근 병원에 후송됐으나 치료 네 시간 만에 사망했다.

최 전 회장의 삼남 용혁 씨는 공산학원이 운영하는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사남 재혁 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최 전 회장이 1999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가 2010년 4월 이혼한 KBS 아나운서 출신 장은영 씨와는 자녀가 없다. 장 씨는 연세대 재학 시절인 1992년 미스코리아 선에 뽑혀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대중적 인기를 모은 KBS ‘열린음악회’를 진행하다가 27살 연상의 최 전 회장과 결혼했다. 장 씨와 최 전 회장의 러브스토리는 2012년 3월 종영한 SBS 아침드라마 ‘태양의 신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장 씨는 그의 언니인 혜영 씨와 함께 방배동 서래마을에서 커피숍을 운영 중이다.

▲돈 없어도 남부럽지 않은 호화 생활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사진=뉴시스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높은 곳에서 살지 못한다고 한다. 놀이기구는 물론이고 엘리베이터 타는 것도 두렵다고 한다. 한 피해 학생의 학부모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했고, 여중생 딸을 잃은 아버지가 자책감에 사고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사고 후 보상금은커녕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최 전 회장 일가의 삶을 보면 ‘이건 뭔가?’ 싶다. 지금가지도 아픔을 겪은 성수대교 붕괴 피해자들과는 달리 너무나도 멀쩡히 잘살고 있다. 만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지금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과연 경영권과 700억원의 재산을 내놓고 물러난다고 해서 그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동아그룹은?>
▲1945년 충남토건사 설립
▲1957년 동아건설산업㈜로 사명 변경
▲1968년 대한통운 인수
▲1973년 동아종합상사 설립(해외 사업 진출)
▲1977년 최원석 회장 취임
▲1983년 리비아 대수로 공사 수주
▲1990년 리비아 대수로 2단계 공사 수주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8년 최원석 회장 퇴진, 국내 최초 워크아웃 대상기업 확정
▲2000년 11월 법정관리 대상기업 결정
▲2001년 5월 파산선고, 그룹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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