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남은 두 마리의 용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소재의 성곡미술관. 고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옛 집이 있던 자리에 설립됐으며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부인 박문순 씨가 관장을 맡고 있다. '성곡'은 김성곤 창업주의 호다. 전시실과 수장고, 세미나실, 자료실 등이 있는 2개의 건물과 야외조각공원으로 이뤄져있다. 사진=한종해 기자
사업다각화. 기업이 주 사업 이외의 다른 분야로 사업 범위를 확장시키는 경영전략을 말한다. 사업다각화는 통상 네 가지로 나뉜다. 예컨데 현대자동차가 부품 회사인 현대모비스를 만든 것은 ‘수직적 다각화’다. 만일 승용·승합만 취급하다가 레이싱용 차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면 이는 ‘수평적 다각화’로 볼 수 있다. 또한 버스 사업을 시작했다면 ‘관련성 다각화’로, 자동차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로 영역을 확장했다면 ‘비관련성 다각화’로 볼 수 있다.
이중 성공만 한다면 가장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은 ‘비관련성 다각화’다.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고 동시에 기업의 리스크를 분산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실패하면 회사 전체의 부실을 가져올 수 있어 가장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경영전략이다. 여기 ‘자동차’와 ‘정치권’을 기웃대다가 회사를 말아먹은 장본인이 있다.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다.

▲능력을 인정받은 젊은 회장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쌍용그룹은 늦었다는 생각을 못해 무너졌다. 총수 한 사람의 오판이 재계를 호령했던 우량그룹의 해체를 불러온 것이다.

쌍용그룹은 김성곤 창업주가 1939년 대구에서 설립한 소규모 비누공장 삼공유지를 모태로 출발했다. 1948년 금성방직을 설립하면서 기반을 확립한 쌍용그룹은 1962년 쌍용양회, 1967년 쌍용제지(설립 당시 사명은 삼화제지), 1967년 쌍용해운(설립 당시 사명은 금성해운)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1973년 쌍용정공, 1976년 쌍용중공업과 쌍용정유, 1977년 쌍용건설, 1978년 쌍용엔지니어링을 설립한 쌍용그룹은 1980년대 들어서서는 1984년 쌍용투자증권, 1985년 쌍용경제연구소, 1988년 쌍용투자자문 등을 설립하면서 건설업, 중화학공업, 금융업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1975년 김 창업주의 갑작스런 작고로 31세의 나이로 그룹을 이어받은 장남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은 쌍용그룹의 제2의 성장을 이끌었다. 1973년부터 시작된 쌍용양회 동해공장을 연간 560만 톤 규모로 증설하는 프로젝트를 7년 만에 이뤄냈고 1976년에는 이란의 국영석유공사(NICO)와 합작하여 쌍용정유를 설립하고 1980년에 지분을 전량 인수하며 쌍용정유를 국내 3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같은 해 김 전 회장은 쌍용중공업을 설립하여 직접 사장직에 올라 사업 안정화를 이끌었고 1983년에는 효성증권(쌍용증권)을 인수해 국내 굴지의 증권사로 성장시켰다. 김 전 회장이 그룹을 이끈 지 20년이 되던 1995년에는 1974년 대비 192배(15조5240억 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였다.

▲김석원과 하동환의 잘못된 만남

성장가도를 달리던 쌍용그룹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자동차 산업을 만나면서부터다. 1986년 쌍 쌍용그룹은 하동환자동차에서 시작한 동아자동차공업을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쌍용자동차는 코란도와 무쏘라는 지프형 자동차를 선보이면서 급격히 부상했지만 현대, 대우, 기아자동차의 공세로 쌍용자동차는 사세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안팎으로 자동차를 포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포기가 답이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포기 대신 투자를 선택했다. 쌍용그룹은 추가적인 투자와 신모델 개발을 위해 용평리조트 등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 1990년대 중반 쌍용그룹 자산의 대부분이 은행 담보로 잡혔다. 그룹 내부에서 자동차 사업 중단을 요구하던 인사들은 줄줄이 잘려나갔고 그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됐다.

이러한 김 전 회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쌍용자동차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벽을 넘지 못했다. 1992년 쌍용자동차의 내수 점유율은 1.6%에 불과했고 이후에도 계속 하락세를 보였다. 그럼에도 김 전 회장은 1995년부터 4년간 3조 원을 쌍용자동차에 투입했다.

김 전 회장이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결국 그는 자동차사업을 접기로 하고 쌍용자동차 매각에 나섰다. 김 전 회장은 한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당시 자동차사업 진출을 준비 중이던 삼성그룹과 대우그룹에 동시 매각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이중 매각 협상을 알아차린 삼성은 쌍용자동차 인수에서 발을 뺐다. 대우그룹도 삼성이 인수를 포기하자 인수 가격을 대폭 내려 제시했다.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결단을 못 내리고 한동안 우왕좌왕했다. 그러는 동안 쌍용그룹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수조원의 돈을 빌려준 은행들과 채권단은 김 전 회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민하던 김 전 회장은 쌍용자동차 처리를 채권단에 넘겼고 채권단은 대우에 매각 협상을 재개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쌍용자동차 채권단에 인수 조건으로 막대한 추가지원을 요구했다. 채권단은 이를 받아들였고 쌍용자동차는 대우그룹 품에 안겼다. 김 전 회장은 단돈 1원도 못 건졌다. 1998년 1월 대우그룹에 쌍용자동차를 넘겼을 때 쌍용그룹 계열사들이 떠안은 쌍용자동차의 부채는 공식적으로 1조7665억원이나 됐다. 쌍용자동차에 투자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급보증을 섰던 계열사들은 줄줄이 매각의 길을 걷게 됐다.

▲때 아닌 권력욕심

그룹의 고속성장을 이끌 만큼 뛰어난 경영성과를 보이던 김 전 회장이 포기할 때를 잡지 못한 이유는 뭘까? 물론 자동차 사업에 대한 김 전 회장의 욕심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잠시 한눈을 팔았던 것도 무시 못 할 이유 중 하나다.

김 전 회장은 정계 진출이라는 특별한 외도를 했다. 쌍용자동차의 부실로 그룹이 위태로웠던 1996년 김 전 회장은 15대 국회의원(민자당 소속)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1997년 쌍용자동차 부실 문제가 본격화되고 외환위기까지 겪으면서 1998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그룹 회장으로 복귀했지만 약 2년간의 외도는 김 전 회장의 판단력을 흐려놓기에 충분했다.

쌍용그룹 로고 변천사

물론 김 전 회장의 정계 진출에는 그의 부친 김성곤 창업주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김 창업주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될 정도로 당대를 주름잡았던 정치인이었다. 1913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창업주는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교내 항일운동을 주동해 퇴학당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대구부청, 대구상공은행에서 월급쟁이로 일하다가 1939년 삼공유지를 설립해 쌍용그룹의 기반을 마련했다.

1950년대에는 언론사에 진출했다. 1952년 동양통신을 설립하고 1년 뒤 연합신문을 인수했다. 정계에는 1958년 대구 달성에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처음 진출했다. 4‧19 혁명 뒤 정계를 잠시 떠났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 다시 복귀하여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장과 공화당 재정위원장 및 당무위원을 역임한 김 창업주는 거물급으로 떠올랐다. 1967년 제7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공화당에서 이른바 ‘당 4역’으로 정당을 지휘했다.

하지만 김 창업주는 10‧2 항명사건의 주동 인물로 지목받으면서 중징계를 받고 정계를 떠났다. 10‧2 항명사건은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사건으로, 그에 분노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항명사건 주동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족치라고 지시했다. 이후 김 창업주는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1975년 타계한 후 국민훈장 무공화장이 추서됐다.

아버지처럼 정계에 입문해 정치와 자동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던 김 전 회장은 두 마리 모두 놓치는 패착을 겪었다. 계열사 매각에 나선 쌍용그룹은 쌍용자동차를 대우그룹에 넘긴 1998년 쌍용투자증권을 미국의 H&Q AP에 매각하고 1999년 쌍용정유를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사 펀드에 매각했다. 2000년에는 쌍용중공업(현 STX)을 한누리투자증권 컨소시엄에 매각하고, 2002년 쌍용화재를 중앙제지에 매각했다. 2003년에는 용평리조트를 세계일보에 매각했으며, 쌍용캐피탈, 남광토건을 계열분리 했다.

주력회사인 쌍용양회는 일본 태평양시멘트로 경영권이 넘어갔고, 대우그룹 해체로 다시 매물로 나온 쌍용자동차는 중국에 넘어갔다가 다시 인도에 팔려나갔고, ㈜쌍용은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 쌍용건설만이 한국자산관리공사를 주인으로 맞았다가 워크아웃, 법정관리 등 힘든시간을 겪었지만 2015년 두바이투자청을 최대주주로 맞이한 후 재기에 성공했다. 쌍용그룹은 ‘쌍용’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사실상 공중분해된 셈이다.

2000년 12월 그룹의 모태인 쌍용양회의 경영권이 넘어가자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김 전 회장은 2004년 말 쌍용그룹 재산 310억원을 개인 명의의 재산으로 빼돌린 혐의로 구속됐다. 이밖에도 김 전 회장은 계열사인 쌍용양회가 소유한 42억원짜리 임야를 차명으로 헐값에 사들인 혐의, 그룹 계열사가 운영하는 고속도로 휴게소 영업권을 비서 명의로 만든 회사를 통해 싼값에 사들인 혐의, 폭락한 자신의 계열사 주식을 쌍용양회에 비싼 값에 팔아 54억원의 이익을 남긴 혐의 등을 받았다.

2007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4주년에 특별사면을 받은 김 전 회장은 친인척, 과거 참모들과 미래 사업에 대한 구상을 하면서 재기를 노리다가 ‘신정아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2008년 7월 위장 계열사 4곳에 1271억원을 부당지원한 혐의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김 전 회장은 즉각 항소하여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어 2011년 12월에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과 사회봉사 200시간을 최종 선고 받았다.

▲부인은 미술관장으로, 아들들은 대주주로

쌍용그룹 해체 당시 김 전 회장은 명목상으로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현재 김 전 회장은 전직 국회의원 자격으로 헌정회로부터 매달 120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는 게 전부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가족들은 이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먼저 김 전 회장의 부인 박문순씨는 성곡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2007년 11월 이른바 ‘신정아 게이트’의 여파로 잠시 관장직을 떠난 적이 있지만 지난 2011년 3월 관장으로 복귀했다. 박씨가 관장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는 김 전 회장의 누나인 김인숙 전 국민대 교수가 미술관을 운영했다.

김 전 회장의 장남 지용씨는 용평리조트 상무를 지냈으며 현재는 국민대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국민학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대한스키지도자연맹과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도 겸임 중이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장남 몽필씨 차녀 유희씨와 결혼한 바 있다. 특히 지용씨는 올림픽 개발효과를 누리고 있는 평창에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는 방송인 김성경씨와의 열애‧결별 소식이 전해지며 미디어를 타기도 했다.

지용씨는 2004년 김 전 회장이 구속될 당시 받았던 혐의 중 하나인 편법 매각의 대상, 고속도로휴게소 운영권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는 태아산업의 지분 37.3%를 보유하고 있다.

1998년 8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세워진 태아산업은 현재 충북 음성에 두 곳, 경기도 여주에 한 곳 등 총 세 곳의 휴게소를 운영하면서 2016년 386억여원의 매출액과 4억여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이 회사의 주주 구성을 보면 지용씨의 동생인 지태씨가 37.3%로 최대주주이며, 지용씨가 34.0%, 지용씨의 또 다른 동생인 지명씨가 24.9%,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박문규씨가 16.2%를 갖고 있다. 박씨는 김 전 회장의 처남이다.

쌍용건설이 2010년 준공한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21세기 건축의 기적이라 불리며, 쌍용건설은 국내 3차원 입체설계(BIM) 시공부문 최고 건설사로 선정됐다. 이밖에도 영국왕립재해예방협회 안전관리 부문 최우수상, e-MBR 하페수 초고도처리공법 환경신기술 인증, KEPIC 인증,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제품 디자인 부분 수상, 싱가포르 건설청 건설 대상 플래티넘 골드, 친롼경 건설기업 대상 Star, 싱가포르 안전대상 대상, 싱가포르 건설대상 시공부문 대상 IF 제품디자인 어워드 등 수많은 상과 인증을 받은 바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쌍용그룹 해체 전까지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차남 지강씨는 그룹 해체 후 국내로 들어와 2002년 친인척 등과 함께 자본금 1억원으로 기획이벤트와 쇼핑몰 등을 하던 동아시아회사를 창업했다. 지강씨는 동아시아회사 임원으로 재직하면서 2003년 8월 IT업체 진두네트워크 인수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수 중도금을 납입하지 못해 주식양수도 계약이 깨졌다. 동아시아회사를 나온 지강씨는 특별한 직업 없이 투자활동을 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지강씨는 2011년 10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경찰에 따르면 지강씨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자신의 오피스텔 화장실에서 문고리에 목을 매 숨진 채 여자친구에게 발견됐다. 유서는 따로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날 오전 2시30분께 여자친구에게 자살을 암시한 뒤 연락이 끊긴 것으로 전해졌다.

쌍용그룹 해체 후 쌍용건설 사장직 내놓고 물러났던 김 창업주의 차남 석준씨는 그의 경영 능력을 필요로 한 직원들의 요청으로 다시 쌍용건설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이후 실적 악화에 의해 해임안까지 통보되는 등 위기를 겪어야만 했지만 최근에는 워크아웃 졸업 이후 건설 명가 재건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 창업주의 3남 김석동 전 쌍용증권 회장은 1986년 한상태 세계보건기구 명예사무처장의 딸 준희씨와 결혼했다. 그는 그룹 붕괴 이후 잇츠티비, 영화직물 등의 개인사업을 통해 재기를 꿈꿨으나 실패의 쓴맛을 봤다.

▲주변의 충언을 외면한 회장님의 대명사

김 전 회장을 보면 진나라의 소왕(昭王)이 생각난다. 중국 진나라와 조나라가 전쟁을 벌이던 시절, 장평 싸움을 승리로 이끈 진의 소왕이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려하자 그의 신하 백기(白起)가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다며 반대 의견을 올렸다. “우리가 장평에서는 이겼지만 병력을 반 이상 잃어 국내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원정을 감행한다면 조나라와 제후의 군대들에게 협공을 당해 필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소왕은 이를 무시한 채 조나라를 쳤고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전력 악화로 병사들을 모두 잃는 수모를 마봤다. 소왕은 포기를 몰랐다. 반대 의견을 올렸던 백기에게 출정을 명했다. 백기는 병을 핑계로 사퇴했고 소왕은 또 다른 신하인 왕흘에게 조나라 공격을 명했다. 왕흘 역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했다.

굴신제천하(屈臣制天). 자신 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뜻을 굽혀 큰일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김 전 회장이 쌍용차 인수를 반대하는 임직원들의 뜻을 굽어살폈다면 지금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쌍용건설이 1997년 벨기에의 베식스(BEXIS)사와 함께 수주, 건설한 두바이에서 2번째로 높은 건물. 에미리트 오피스 타워와 주메이라 에미리트타워 호텔로 구성돼 있는 쌍둥이 빌딩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쌍용그룹은?>

▲1939년 삼공유지 설립
▲1948년 금성방직 설립
▲1960년대 쌍용양회, 쌍용제지, 쌍용해운 설립, 하동환자동차(쌍용자동차) 인수
▲1970년대 쌍용정공, 쌍용중공업, 쌍용정유, 쌍용건설, 쌍용엔지니어링 설립(1975년 김석원 회장 취임)
▲1980년대 쌍용투자증권, 쌍용경제연구소, 쌍용투자자문 설립
▲1998년 쌍용자동차 매각, 부채 약2조원, 계열사 매각 시작
▲2002년 쌍용양회 워크아웃 돌입, 쌍용그룹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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