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이 명단 받아 리서치 기관에 전달… “사전 교육했다는 증언 확보”

[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최근 보험연구원이 실시한 보험설계사 산업재해보험 관련 설문조사에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표본 선정 단계에서 보험설계사들 명단이 보험사측에 사전 유출됐다는 것이다. 일부 보험사는 이를 바탕으로 조사 대상자에게 ‘업계 입장에 유리하도록 입장을 표명하라’는 사전 교육을 했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보험설계사 산재보험 의무가입 문제는 보험업계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다. 보험 가입이 의무화될 경우 보험사가 해당 보험료의 절반을 부담하게 돼 보험업계에 적지 않은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재보험 의무화는 고용형태 전환 문제와 함께 보험설계사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보험연구원 설문조사, 기획 의도 있었나?

3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보험연구원이 발간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입법에 대한 보험설계사 인식조사’ 보고서의 결과가 왜곡됐다는 의혹이 번지고 있다.

전국보험설계사 노동조합은 한 대형 생명보험사가 보험연구원의 설문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전속설계사 명단을 사전에 확인했고, 이를 바탕으로 설문 내용에 대해 보험업계에 유리한 입장을 표시하라는 교육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노조 측은 사전교육에 참석한 설계사 제보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 측에 따르면 보험연구원은 ‘서울마케팅리서치’라는 리서치 기관에 관련 설문조사를 맡기면서 삼성·한화·교보·미래에셋·신한·AIG·ING·매트라이프생명 등 8개 회사의 설문 대상자 2560여명의 명단을 제공했다. 리서치 기관은 이를 바탕으로 지난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 간 전화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문제는 이 같은 설문조사에 앞서 설문조사 대상자가 사전에 보험사에 유출된 정황이 확인됐다는 점이다. 보험연구원이 보험사로부터 설문조사 인원을 전달받아 리서치 기관에 전달했기 때문에 보험사들이 설문 대상자를 모를 수 없다는 것이 노조 측 설명이다.

오세중 설계사 노조위원장은 “설문 대상 보험사로 지정된 한 대형보험사 지점에서 대상자들을 모아 관련 교육을 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보험연구원에서 설문조사 전화가 올 테니 산재보험 가입에 대해 부정적 응답을 하라’거나 ‘근로자성 지위가 인정될 경우 세금 부담이 급증하고 각종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는 교육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설문조사 대상으로 산재보험 가입률이 높은 ‘생보사 전속설계사’만 선정한 부분도 여론조사 결과를 의도적으로 비틀기 위함일 수 있다”며 “정부가 설계사들의 노동3권 보장과 산재·고용보험 의무화를 추진하자 보험업계에서 조직적으로 설문조사를 기획했을 가능성까지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이라 지적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보험연구원은 정황상 설문조사 전에 조작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낮다는 입장이다. 설문조사 대상이 많고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돼있어 대상자들을 모아 교육을 하기 힘들지 않았겠느냐는 게 보험연구원 측 해명이다.

보험연구원 관계자는 “리서치 업체가 설문조사 대상을 무작위로 선정했기 때문에 그런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며 “보험설계사들 사이에서도 개인사업자 지위가 본인들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고용보험에 대해서도 보험사들 사이에 장단점이 공유돼있어 보험사들이 나서서 교육을 하는 식으로 종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개별 지점 단위로 교육을 했을 가능성이 없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일부 회사에서 할 가능성은 있겠지만 조직적으로 하긴 힘들지 않겠느냐”면서도 “설문조사 상 문제 소지가 있는 만큼 향후 조사 때는 이 같은 일이 없도록 신경 쓰겠다”고 밝혔다.

◆보험설계사 산재보험 의무화, 쟁점은?

보험설계사의 산재보험 가입 의무화는 당사자인 설계사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 특히 최근 정부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보험설계사들의 산재·고용보험 적용 확대를 명시하고 국정과제로 추진하는 것과 맞물려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보험설계사들은 다른 특수직과 달리 산업재해 사고 발생 가능성이 낮다. 또한 산재보험은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업무상 재해여부를 본인이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자유로운 근태 양상을 보이는 설계사들 사이 산재보험의 선호가 낮은 이유다. 반면 단체보험은 보장범위나 보장대상 시간, 보험료 부담 측면(보험사 100% 부담) 등에서 비교우위에 있다.

문제는 이 같은 단체보험을 설계사 모두가 가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 위원장은 “현재 단체보험은 생보사 전속설계사들만 주로 가입돼있을 뿐 독립대리점(GA)이나 손보사 설계사들은 따로 보험 가입 없이 활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 생보사 전속설계사 수는 11만1800명이다. 손보사와 GA 소속 보험설계사는 약 38만5100명(손보 8만1300명, GA소속 30만3800명)이다. 지난해 7월 기준 보험설계사의 산재보험 미가입율은 90.6%다. 오 위원장의 설명이 맞다면, 현재 38만명에 달하는 손보사나 GA소속 보험설계사들 중 상당수는 단체보험과 산재보험 중 여느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고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비용 문제로 나가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보험업계가 국회입법조사처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산재보험 가입시 생·손보업계 부담액이 연 469억원 늘어난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고용보험을 포함한 4대보험에 모두 의무가입 시킬 경우 보험업계는 연 6037억원이 늘어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당 액수는 지난해 생·손보사 순이익인 6조1714억원의 10%에 해당한다.

보험업계는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4대보험이 의무화될 경우 저능률 설계사에 대한 구조조정에 나설 수 밖에 없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설계사들 내부에서도 보험업계가 구조조정을 할 경우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을 대상이 자신들이란 인식이 강한 상황이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9월 발간한 ‘보험설계사의 4대 보험 적용 쟁점 및 향후과제’에서 김창호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보험설계사의 법적 지위에 대해 근거를 명확히 하기 위한 입법적 보완이 필요하다”면서도 “제3의 객관적 기관을 선정해 보험설계사의 4대 보험에 대한 정확한 설명과 함께 당사자의 분명한 요구를 확인한 후 4대보험 확장 여부를 판단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고용시장의 균형이 붕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직종별 특성에 맞는 맞춤형 보호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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