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된 꿈 가득한 '평택 시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 인근에 위치한 안정리로데오 거리. 사진=한종해 기자

[파이낸셜투데이=곽진산 기자] ‘평택 시대 개막’ 다소 공허해 보이는 이 문구는 64년간 용산에 거주했던 미8군사령부가 지난 7월 11일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로 보금자리를 옮기면서 천명한 슬로건이다. 미군기지 이전이라는 대형 사업을 위해 국방부는 지난해 평택기지의 규모도 늘리는 공사도 진행했다. 평택기지는 총 1467만7000㎡(444만여평) 부지로 여의도 면접에 5배에 이른다. 넓어진 기지 내에는 꼼꼼하게 입주자를 배려한 건물들도 들어서고 있다. 한국과 미국 군 측에 양분된 513동의 건물은 물론 학교, 상점, 은행, 운동장 등 미군과 가족을 위한 시설도 포함됐다. 초‧중‧고교는 이미 문을 열고 미군 자녀들의 입학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평택 기지로 이전하는 인구수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정부가 추산한 인구는 미군과 미군 가족, 카투사, 미군 민간인 등 포함해 2020년까지 4만2771명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인구만 올해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나는 셈이다. 여기에 삼성전자 고덕산업단지와 LG전자 진위산업단지 등 대형 개발호재가 겹치면서 평택시 인구도 2020년까지 90만명에 달하는 수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외지인의 방문이 예견되는 평택, 인구의 증가가 상권 호황으로 이어지는 공식을 대입해 볼 때 그들이 말하는 ‘평택 시대’도 단순한 수사는 아닌듯했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 인근에 위치한 안정리로데오 거리. 사진=한종해 기자

평택 시대를 외친지 약 3개월이 지난 시점. 캠프 험프리스 주변 상권은 기지 이전으로 인한 어수선함은 사라지고 잔잔한 고요만 있었다. “아직 멀었지” <파이낸셜투데이>가 지난 17일 캠프 험프리스가 있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를 방문해 만난 잡화점 판매상 권양선씨는 평택 미군기지 주변 상권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에겐 평택 기지 이전으로 인한 호황 기대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평택시 인구, 2020년 90만명 수준 전망
상인들, “한철 장사로 한해 버텼다”

다만 권씨가 ‘아직 멀었다’고 한 속내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기지가 곳곳에 건설되면서 평택은 속된 말로 ‘땡’잡았다. 일제강점기 평택 비행장으로 사용됐던 곳이지만 전쟁 후 규모가 더 커지면서 미군을 포함한 외지인들의 유입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기지 건설에 대한 반발이 없지는 않았다. 2006년 캠프 험프리스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추리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 미군들이 기지 주변에 거주하면서 호기롭게 달러를 풀었고 시장 상인들은 그들이 선사한 자본의 맛을 봤기 때문이다. 권씨 역시 그때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한철 장사로도 1년을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월세 내기도 버겁다”고 말했다.

기지촌에 채워진 투기금의 허영심

기지촌엔 다른 문화가 심어진다. 상권의 구조는 어디를 가든 유사하지만 미군기지가 들어선 곳은 판매 구조와 방식을 달리한다. 곱창과 떡볶이를 팔던 포장마차가 갖가지 튀김을 파는가 하며 가격표엔 원화대신 달러($)가 표기돼 있다. 한국인 방문이 손에 꼽히는 곳이라 상인들이 혀를 꼬아가며 인사를 건네는 것은 일상이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이성연씨는 기자를 보며 “오늘 온 사람 중에 한국인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한때 영어강사였다던 이씨는 용돈 좀 벌려고 시작했던 일이 벌써 20년이 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최근 상권 상황에 대해선 고개를 저었다. 이씨는 “보면 알겠지만 미군들이 늘어나면서 유흥업소나 많아졌지 우리 같은 상인들에겐 별다른 영향은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 인근에 위치한 안정리로데오 거리. 사진=한종해 기자

실제로 팽성읍을 포함해 평택은 유흥가로 알려져 있다. 평택역 부근에는 ‘쌈리’라 불리는 집창촌도 성행하고 있다. 미군들의 유입은 일종의 풍선효과처럼 평택 기지 부근에 슬럼화를 촉발시키고 있었다. 많은 외지인의 증가가 안정리 소상인들에게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다. 그는 “미군기지 이전으로 (이곳에) 미군들이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그냥 막연한 기대일 뿐이지, 잘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다”고 씁쓸해 했다.

이불을 판매하는 김모씨도 “아직은 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효과는 없다”며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매출이 오를 것으로 기대는 하고 있다”고 말했다.

괜한 기대감은 현실을 가상의 것으로 채우기도 한다. 안정리 로데오 거리에는 존재의 이유가 불분명한 매장들이 곳곳에 있다. 시골의 작은 슈퍼마켓처럼 보이는 곳을 들어가니 가게 주인은 “여기는 장사 안 한다”며 내쫓았다. 물건들은 먼지로 가득 뒤덮여 있었고 상품성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주인은 애초에 장사를 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이밖에 안정리에는 단지 자리만 지키고 있는 가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고지서만 쌓여 있거나 수개월간 문을 열지 않는 곳도 있었다.

땅값 폭등…주인‧물건 없는 가게도
관광예산 20%에 불과…기지촌 상권 침체

최근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인구 유입으로 안정리 부근의 땅값은 지난해 3.3㎡당 80만원에서 최근 250만~300만원으로 폭등했다. 상권 활성화와 주택수요 증가라는 기대감에 투자자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지대값이 잇달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3.3㎡ 당 800만원대에 거래되던 일반상업지역 토지도 올 들어 1700만~2500만 원까지 호가를 형성하고 있다. 점주들이 가게를 운영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이유다. 2평가량 되는 분식점을 운영하는 박모씨는 “이 조그마한 가게도 2천만원으로도 팔지 않는다”며 “땅값도 계속 오르고 있는데 아마도 가게를 판매하려는 사람은 여기 어디에도 없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안정리의 평택 시대는 어디로?

적어도 안정리의 소상인들에게 ‘평택 시대’는 헛된 희망일 수도 있다. 캠프 험프리스 내부에는 군인들과 가족들이 사용하는 온갖 부대시설이 구비돼 있다. 사실상 하나의 도시에 가까워, 그들이 굳이 영외로 나와서 돈을 쓸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소상공인 업무를 담당하는 평택시 직원도 이를 가장 우려했다. 평택시 관계자는 “예전 미군 호황기 때는 부대 앞에서 소비할 수 있는 것이 많아 상인들이 정말 잘 살았다. 그것만 믿고 살아가다가 낙후를 막지 못했다”며 “캠프 험프리스의 부대시설이 완전하다 보니, 상권의 위축은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캠프 험프리스 전경. 사진=뉴시스

관광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본질적인 이유도 있다. 정부가 평택으로 미군기지를 옮기면서 지원하기로 한 예산은 2006년부터 2020년까지 18조8016억원이다. 이중 관광 지원에 집행하기로 한 예산은 20%도 채 되지 않는다. 정부는 그동안 미군 주거 용지 등 토지개발에만 치중해왔고, 관광 지원이나 상권 개발에는 외면했다. 향후 상황도 밝지만은 않다. 평택시의 올해 예산은 1조2293억원에 달하지만 도시재생과에서 쇼핑몰상가 활성화와 커뮤니티광장 조성 등 사업에 집행할 예산은 38억원에 불과하다. 상인들에게 평택 시대는 열렸을까. 이제 기회는 열렸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단 그 사이로 허황된 꿈만 들어오지 않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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