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지난 7월 금융위원회는 국민행복기금과 예금보험공사 등 금융 공공기관에 쌓인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자 부실채권과 민간채권 일부를 소각했다. 채무자 214만명, 채무액 25조7000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소멸시효 완성채권은 법률상 시효가 완성된 채권이므로 추심해선 안 된다는 취지다. 최근에는 대부업체들이 보유한 7조원대 시효완성채권을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무상 소각하는 결정도 내려졌다. 과도한 채무로 고통을 겪고 있는 금융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들이 정상적 신용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그런데 이 같은 정책이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덮어놓고 돈을 빌린 뒤 상환 의무를 불이행하면 금융기관이 손해를 볼 개연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빌린 돈을 갚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자 당연한 일”이라며 “연체가 아무리 길어졌다고 해도 갚을 능력과 재산이 있다면 갚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견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지적에는 ‘채무자를 쉽게 양산하는 환경’에 대한 고민이 빠져있다. 금융기관에게 현재 한국의 금융시장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수준이다. 저금리 기조를 바탕으로 은행 등 금융사들은 1%대 낮은 금리에 자금을 조달한다. 기관들은 여기에 가산금리를 붙여 신용대출로 판매한다. 시중은행과 제2금융권, 카드사, 캐피탈, 대부업체의 대출 금리는 2~20%까지 천차만별이다. 고소득·고신용자가 시중은행에서 2~3%대 저금리 대출을 이용할 때, 저신용·저소득자는 1금융권 바깥에서 연 10~20%대 고금리로 대출받는다. 소득과 신용수준에 따른 ‘금융 차별’이 지나친 수준이다.

법은 채권자에게 지나친 권리를 부여한다. 현행법상 3달 이상 연체가 생기면 채권자가 담보 잡힌 집을 경매에 붙일 수 있다. 채권자 입장에선 채무자를 잘 선별해야 할 인센티브가 사라지는 셈이다. 한국의 가구당 처분가능소득 대비 원리금상환액 비율(DSR)은 26.6%이다. 소득 2분위 이하 자영업자의 DSR은 33.8%에 달한다. 쉽게 말해 내가 한해 벌어들이는 돈에서 3분의 1은 원리금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금융기관들이 원리금 상환능력은 차치하고 쉽게 대출을 해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니 가구 당 가계부채는 가처분가능소득 대비 178.9%에 이른다.

고금리에 시달리는 채무자는 시간이 지나 다중채무자로 재탄생한다. 여러 곳에서 돈을 빌리는 이유는 다른데서 생기는 빚을 돌려막기 위해서다. 올해 상반기 기준 다중채무자는 390만명, 채무액은 450조원에 달한다. 전체 가계부채 1400조원 가운데 32.1%에 달하는 액수다. 저축은행 채무자 가운데 다중채무자수는 총채무자의 65%며, 그 잔액의 비중도 66.2%에 이른다. 하지만 금융기관들은 이러한 사실을 등한시한다. 돈이 되는데 돈을 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연체채권은 현행법상 5년이 지나면 소멸시효가 완성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손쉬운 시효연장을 통해 5년 내지 10년까지 시효를 연장할 수 있다. 채권자들은 채무자가 법을 모른다는 점을 악용해 각종 방식을 활용해 죽은 채권을 부활시킨다. 2002년 카드대란 당시 살인적 금리로 빚을 진 사람들 가운데 아직까지 가계 부실채권을 보유한 채무자가 107만명이나 된다. 채무의무가 사라졌음에도 채권자에 의해 시효연장을 ‘당한’ 셈이다. 이 정도쯤 되면 도덕적 해이의 주체는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가 된다.

원리금 상환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신용을 공여한 금융기관. 불법 추심을 벌이고 죽은 채권을 부활시켜 다른 추심업체에 팔아치운 금융업자들, 그간 이 같은 행태를 손 놓고 방관하고 있던 금융당국. 한국의 부실채권 문제는 신용거래를 업으로 삼고 있는 모든 주체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들은 채무자들을 깊은 고리대의 ‘늪’으로 빠지게 하지도, 더 심하게는 자기 존엄을 포기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소멸시효 만료채권 소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금융 취약계층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로 봐야 한다.

채무자의 부실채권을 저가에 대신 매입해 소각하는 주빌리 은행은 “빚은 갚아야 하는 것이지만, 존엄한 삶 모두를 포기해가며 노예와 같은 처지에 내몰릴 때까지 갚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들이 시민사회에 호소하며 돈을 끌어 모아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돈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금융이 사회를 망각하는 순간, 사회는 야만으로 가득 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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