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세계’ 무색하게 한산한 거리…상인들, 권리금마저 포기해

서울 용산구 이태원 세계음식거리 내 한 음식점 모습. 사진=오만학 기자

[파이낸셜투데이=오만학 기자] “그런 걸 뭘 자꾸 물어. 말해봤자 마음만 안 좋지”

서울 용산구 이태원1동 이태원역 근처에서 30년째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70대·여)의 말에서는 한숨이 묻어났다. 유명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될 정도로 손님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지만 최근 눈에 띄게 손님이 줄었다. 김씨는 ‘가게를 자주 찾던 미군들의 수요가 줄어서’라고 했다.
“미군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먹는 햄버거보다 더 맛있다고 자주 찾곤 했어. 근데 요즘은 미군기지가 옮겨가서 손님이 뚝 끊겼지 뭐. 그나마 주말에는 내국인들이라도 찾아서 좀 낫지 그마저도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살 지경이야.”

앞서 지난 7월 11일 미8군사령부는 경기도 평택에 새 둥지를 틀고 공식적인 입주를 시작했다. 주한미군사령부도 올해 말까지 평택으로 이전을 완료할 예정이다. 이로써 주한미군은 60여년 간의 용산시대를 마감하고 평택시대를 열게 됐다.

◆밤낮으로 흥겨웠던 거리, 밤낮으로 파리만 날려

용산미군기지 시대가 마감한 지 세 달이 흐른 지난 16일 오후에 찾은 서울 이태원 곳곳에는 한산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낮과 밤을 떠나 젊음과 이국적인 분위기로 활기를 띄던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일대 거리는 흥겨운 노래만 흘러나올 뿐 사뭇 조용했다. 식당과 카페, 레스토랑들은 창을 활짝 열어젖히며 손님들을 기다렸지만 곳곳에는 빈 의자만 길게 늘어선 상가들이 가득했다.

이태원역 인근 S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미군기지가 이전한 이후 전·월세 물량이 20% 가까이 더 늘어났다”고 말했다. 또 “심지어 미군기지가 빠지기 전에는 상인들이 권리금을 1억씩 받았는데 지금은 그것도 포기하고 내놓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 중개업소 창에는 전·월세 세입자를 찾는 전단지로 가득했다.

이태원역 인근 한 공인중개업소 모습. 세입자를 찾는 전단지가 줄지어 붙어있다. 사진=오만학 기자

인근 경리단길과 해방촌 주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미8군 기지가 인접해 있어 평일에도 미군 및 외국인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기자가 찾았을 땐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종종 외국인이 보이긴 했지만 ‘이국적 거리’라고 하기에는 어색했다. 외국인보다 내국인이 더 많았다.

이른 저녁 해방촌 일대 한 맥주집. 평소 같았으면 외국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뤄야 했지만 이날은 파리만 날렸다. ‘미군기지 이전 때문인지 가게가 한산한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이곳에서 5년째 장사해오던 A씨는 “평소에는 사람이 많은데 오늘만 이상하게 손님이 없는 것”이라며 “미군기지 이전과 관계없이 장사가 잘 되는 편”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기자가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40여분가량 매장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단 한 명의 고객도 방문하지 않았다.

경리단길 인근 B공인중개업소 대표는 “미8군이 빠지고 나서 상권이 확실히 죽었다”면서 “경리단길은 미군기지랑 가깝고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 곳이라 상인들이 5000만~1억원씩 권리금을 꼬박꼬박 챙겼는데 지금은 권리금을 포기하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말에 따르면 월 70만원대를 형성하던 이 일대 월세금은 현재 월 50만원대로 내려가고 어느 곳은 40만원대로까지 폭락했다. 주변 공인중개업소 중에는 퇴근을 하기에는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후 5시에도 문을 닫는 곳이 종종 보였다.

약 40여개국의 음식점이 모여 조성된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서도 상인들의 곡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곳 한 디저트카페에서 1년째 일하고 있다고 밝힌 권소연(21·여)씨는 “미군들의 수요가 준 게 확실히 느껴질 정도”라며 “미군이 거의 사라지다시피해 보통 저녁 시간이면 사람들로 북적대야 할 이곳 분위기가 요즘에는 예전 같지 못하다”라고 토로했다.

윤락가가 길게 늘어선 이태원역 인근 한 골목 모습.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이곳을 찾는 발길이 크게 끊겼다. 사진=오만학 기자

◆걷잡을 수 없는 침체…윤락가 문마저 걸어 잠궈

미군기지 이전의 영향이 가장 역력하게 느껴진 곳은 이태원소방서 뒤쪽 골목에 형성된 윤락가(일명 후커스 힐)였다. 이곳은 용산미군기지 시절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던 곳이다. 지역 상권에 따르면 한때는 미 헌병대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군이 떠나간 지 3개월이 지난 지금 이곳 분위기는 가라앉다 못해 썰렁함마저 느껴졌다. 좁은 골목 사이로 길게 늘어선 20여개의 업소 중 문을 연 곳은 단 두세 곳뿐이었다. 그나마 문을 연 업소에서도 여종업원들이 가끔 지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호객행위를 했지만 별 성과는 없어보였다. 장사가 잘 안되는지 업소 안에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종업원들도 보였다.

이곳 C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한 종업원은 “최근 두세 달 사이 인근 업소들 사이에서 문을 열지 않는 분위기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인근 상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곳은 미군기지가 철수한 이후 장사가 안 돼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침체된 이태원 상권의 분위기는 객관적 지표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서울시 우리마을가게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지난 7월 기준 이태원1동 호프간이주점 평균 매출액은 3183만원으로 전월(3798만원)보다 19.3% 감소했다. 전년 동월(4735만원)과 비교해서는 무려 48.7%나 폭락했다. 점포당 평균 매출 건수도 같은 달 기준 798건으로 전년 동기(938건) 대비 14.9% 떨어졌다.

이태원동 주택 거래량도 덩달아 영향을 받고 있다. 지난달 이 지역 연립/다세대 주택 거래량은 4건으로 지난 7월 13개를 기록한 이후 8월(10개)에 이어 연속으로 하락세를 거듭했다.

일각에서는 미군기지 이전이 장기적으로는 이태원 상권에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2005년 ‘미군용산기지 이전에 따른 이태원 관광특구의 대응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미군부지에 용산공원이 들어서 이태원관광특구에 생태 및 녹지환경이 조성되면 쾌적한 주변환경으로 중장기적으로는 이태원의 개발잠재력이 증대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상인들은 “너무나도 먼 얘기”라고 입을 모은다. 세계음식거리 인근에서 기념품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 상인은 “용산공원이 조성된다해도 2029년이지 않느냐”며 “그때까지 견디라고 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어렵다”라고 토로했다.

한편 이 같은 상인들의 탄식에 대해 용산구청 관계자는 “구에서는 미군 철수 피해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면서 “오히려 이태원 상권이 한남동 인근까지 넓어지는 등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상인들을 위해 ‘IoT 이태원’과 ‘한남동 공예관 건립’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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