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성장 이뤘지만 퇴직연금 역할 못해…전문가 “수익률 재고해야”

[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개인형퇴직연금(IRP) 잔액이 늘고 있지만 그만큼 ‘깡통계좌’가 많아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금융기관들이 직원 성과와 연동해 무리한 판매를 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IRP가 낮은 수익률에 깡통계좌 문제까지 이중고를 겪는 모양새다.

지난 7월 근로자퇴직법 시행령 개정으로 IRP 가입대상이 직장인에서 자영업자와 공무원까지 넓어졌다. 하지만 낮은 수익률 문제로 퇴직연금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엔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보편 연금 역할을 하기 위한 수익률 제고 필요성이 대두되는 이유다.

지난 13일 정무위원회 소속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개인형 퇴직연금(IRP) 계좌 개설현황’ 자료를 확인한 결과, 지난 8월 말 기준 전체 개인형 퇴직연금 계좌 가운데 0원인 계좌는 154만884좌로 5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 의원은 “불필요한 계좌가 많은 데는 개인형 퇴직연금 계좌 판매를 직원들의 성과에 연동해 무리한 판매를 강요하기 때문”이라며 “실적 위주 밀어내기식 판매로 소비자 불완전판매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금융당국의 철저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IRP는 지난 3월 최초 계좌 개설시 1만원 이상 납입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때문에 150만좌가 넘는 0원 계좌 중 상당수가 그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147조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가운데 IRP는 12조4000억원으로 약 8.4%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회사에서 직접 운용하는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과는 다르게 IRP는 개인이 직접 운용이 가능하다. 이직 시 계좌가 유지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세금혜택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하지만 수익률이 낮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IRP 수익률은 1.09%로 2015년에 비해 0.67%포인트나 떨어졌다. 원리금보장형 IRP 수익률은 1.46%였다. 실적배당형 IRP 수익률은 –0.56%로 원금조차 보전하지 못했다.

금감원은 “퇴직연금의 상당 부분이 예금·보험 같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어 지금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는 수익률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며 “지난해는 기준금리가 인하해 수익률이 더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개인형 퇴직연금의 연금수령 비율도 낮은 편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IRP 총 계좌 가운데 만기 후 연금수령 비율은 1.6%에 불과했다. 금액으로 따져도 20.3% 수준으로 낮다. 때문에 퇴직연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원구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같은 추세에 대해 “연금을 선택할 경우 세금을 다소 낮게 매겨 연금 선택을 유도하고 있지만, 일시금을 선택하더라도 일반적인 소득세에 비해 세금이 많지 않아 일시금 선택을 억제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주택위주 자산환경에 기회비용 낮아… 전문가 “수익률 재고해야”

IRP가 실질적 노후 대비 수단이 되기 위해선 실효적인 수익성 제고를 통해 연금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우선 국내 가계자산 중 주택자산 비중이 높은 환경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국내 가구당 평균 자산액 3억6187만원 가운데 실물자산 비중은 2억6788만원(74.0%)이며, 이중 부동산이 2억5029억원으로 93.4%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현재 IRP 등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해 주택을 구매하거나 주택연금(주택 평가액의 70% 종신연금화)을 유지하는 게 연금화하는 것에 비해 기회비용 측면에 있어서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홍원구 연구위원에 따르면 2015년 4월 기준 60세 남자가 1억원을 연금으로 수령하면 보험사에 따라 월 38만원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같은 시기 60세 남자가 1억의 주택을 소유하고 주택연금을 받으면 월 22만7000원을 받았다. 월돈 자체는 적지만 아파트 전·월세 시세나 주택가격 상승 등을 감안하면 후자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지적이다.

홍 연구위원은 “퇴직상품을 제공하는 금융사들 입장에서 최소 주택연금 만큼의 지급액을 보장할 수 없다면 퇴직연금 자산의 큰 이동이 있을 수 있다”며 “퇴직자산으로 생명보험사의 종신연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택을 구입해 그 주택을 연금화한다”고 말했다.

퇴직연금을 기금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기업이 사용자로부터 독립된 신탁기관(비영리법인)을 설립한 뒤 신탁기관 내 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영위원회를 통해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방식을 뜻한다. 투자지향적 금융전문가에게 자산 운용을 맡겨 현행 퇴직연금의 저조한 수익률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언급되고 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은 지난 7월 기자간담회에서 “예금 등 원리금보장 상품에 자산의 90%를 넣어놓고 수익률이 높아지길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런 구조를 바꾸는 핵심이 기금형 퇴직연금의 도입“이라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성과보수 제도를 도입하는 등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경쟁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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