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이제 그만 끝내야

[파이낸셜투데이=한종해 기자] 영국의 프리미어리그,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와 함께 세계 3대 프로축구리그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프로축구 1부 리그인 ‘세리에A’는 2005-2006시즌 막판 리그 사상 최악의 승부조작 스캔들이 터지며 풍파를 겪었다.

사건은 유벤투스 팀 단장과 유럽축구연맹(UEFA) 심판 부위원장 간의 통화 내역을 담은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시작됐다. 녹취록에는 심판 배정에 대한 압력, 승부조작, 회계장부조작, 선수 부정 영입, 대표선수 선발 압력 등 온갖 부정행위 등이 총망라돼 있었다.

2012년 12월 4일 서울 강남구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2012 일구상 시상식에서 최규순씨가 심판상 수상 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 최씨는 2006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2010년 프로야구대상 시상식에서도 각각 심판상을 수상했다. 일구상은 2001년 이후 매년 일구회에서 주는 상으로 현역선수뿐 아니라 기자, 프런트, 심판 등 야구인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일구회는 1991년 프로야구, 아마야구 전‧현직 지도자들이 만든 단체로 은퇴한 야구인들의 권인 보호와 한국 야구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 일로 110년간 우승 29회, 챔피언스 리그 우승 2회라는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던 유벤투스는 최초로 2부리그 추락의 불명예와 함께 승점 마이너스 17점으로 시즌을 시작해야 했고, 최근 2년 간 거둔 우승을 박탈당했다. 스캔들의 중심에 있던 당시 단장 루치아노 모지에게는 5년간의 자격 정지가 선고됐다. 2015년 최종심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긴 했지만 ‘세리에A는 승부조작 리그’라는 이미지는 사람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다.

최근 한국 야구계는 더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일개 구단이 아닌 리그 자체가 존폐 위기에 처했다. 2012년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승부조작 사태는 매년 스포츠면 한쪽을 장식해왔고, 지금은 전직 프로야구 심판 최규순씨의 뇌물수수 사건으로 시끄럽다.

검찰 조사 결과 최씨는 2014년 KBO 심판직을 그만두기 직전까지 구단 관계자들에게 여러 차례 돈을 빌린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빌린 돈 대부분을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현재까지 확인된 연루 구단은 두산 베어스를 비롯해 넥센 히어로즈,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등 4개다.

앞서 지난 7월 두산은 관련 사실을 인정한 뒤 사과했고, KIA는 29일, 삼성은 30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장석 구단주가 조사를 받은 넥센도 조만간 사과문을 발표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이밍이 문제다. 이들의 사과는 전혀 프로답지 못했다. 지난해 KBO에서 관련 사실을 조사했을 당시에는 부인에 급급하더니 검찰 수사에서 구단명이 거론되고 나서야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다웠다면 이런 일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012년 5월 25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2012 팔도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에서 9회말 바티스타의 강속구에 정면으로 맞은 최규순 심판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해당 영상은 최근 누리꾼들에 의해 ‘바티스타의 정의 구현’ ‘바티스타의 참교육 시전’ 등의 제목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팬들은 제대로 뿔이 났다. 해당 심판이 주심으로 나온 경기의 스트라이크존을 ‘퇴근존’이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다. 올 시즌 유독 석연찮은 심판 판정으로 불이익을 본 롯데에게는 ‘심판 줄 돈도 없었나’는 동정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반대로 올 시즌 속칭 ‘잘 나가’는 두산과 KIA는 경기에서 승리할 때마다 심판 매수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

KBO도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12년 승부조작 사건 이후 “부정행위를 뿌리뽑겠다”던 KBO의 외침은 ‘공염불’이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KBO가 심판과 구단 관계자 단 돈이 오간 사실을 확인하고도 경고조치만 내린 후 사안을 비공개로 종결 처리한 것에 대해 검찰에 고발했다.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미 야구계는 각종 승부조작 사건 등으로 1000만명이 넘는 야구팬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바 있다”며 “프로야구 중심인 KBO는 자정능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심판과 구단의 돈거래와 입찰 비리의혹을 덮으려 했다”고 밝혔다.

손 의원은 이어 “사건의 축소와 은폐에만 급급하는 KBO가 더 곪기 전에 조속히 환부를 들어내야 한다”며 “이번 기회에 자정능력을 잃은 KBO의 적폐가 제대로 청산되길 바란다”고 비판했다.

2016년 8월 8일 이호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장을 비롯한 10개 구단 대표선수들이 서울 강남구 청담동 호텔리베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프로야구선수에 의한 경기 조작 사건에 대한 선수협의 입장을 밝히며, 허리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KBO와 10개 구단 일동은 어떠한 고통과 희생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이번 사건과 연관된 아픈 상처가 더 깊어지고 만연하기 전에 말끔히 소독하고 도려내어, 35년간 국민의 사랑으로 자라온 우리 프로야구가 앞으로 더욱 깨끗하고, 공정하고, 신뢰받는 리그로 더급날 수 있도록 대책 마련에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지난해 7월 KBO가 발표한 사과문이다. 팬들은 다시 한번 KBO와 각 구단을 믿어보기로 했고, 그해 KBO리그는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로 관중 800만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10개 구단의 입장수익은 73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식 사과문이었다. 얼룩을 지워내기는커녕 더 키웠다.

더러운 꼴 보려고 제돈내고 그라운드를 찾는 팬은 없다. 그리고 팬이 없으면 야구도 없다. 과거 세리에A가 유벤투스에 내렸던 징계처럼, KBO 역시 관련자들에 대한 강력한 조치로 흔들리고 있는 팬들의 신뢰를 다잡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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