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대 딸들의 생존 전략

[파이낸셜투데이 김진아 기자]최근 재벌 기업들에서는 오랜 관행을 깨고 치맛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남아중심의 유교적 가풍이 지배적인 재벌가에서 여성들이 경영에 참여하며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 급기야 몇몇 재벌 기업 중에서는 남자 형제를 제치고 경영권 승계를 노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굵직한 사업은 이미 남자 형제들이 맡고 있는데다가 여성들은 뒤늦게 업황변동이 큰 사업에 뛰어들어 목돈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세대교체로 인한 경영권 승계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여성 경영자들은 알짜 계열사를 차지하기 위한 자구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파이낸셜투데이>가 재벌가 여성들의 변화하는 경영방식을 짚어봤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장선윤 블리스 사장


세대교체로 인한 여성 경영자 대두…유통·패션 진출
계열분리 위해 실탄마련…부동산·주식 등 활로 모색


재벌가 여성들의 경영 활발해지면서 재계 전반에 여풍이 몰아닥치고 있다. 2세대까지만 해도 경영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신세계그룹의 이명희 회장과 롯데쇼핑 신영자 사장 등 소수에 불과했다. 창업주 때부터 내려오던 장자 중심의 경영 승계 방식으로 인해 여성이 정면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3.5세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여성들의 경영 참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패션·유통·제빵·커피 등 비교적 여성들이 접근하기 쉬운 분야에 진출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각자 사업을 맡고 있던 남자 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여성이라는 핸디캡이 작용해 굵직한 사업을 맡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신구세대 간의 세대교체 시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어 재벌가 여성들은 새로운 사업 방식으로 자구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기업가 거세진 여풍

재벌가 딸들의 활약이 거세다. 이전 세대와 달리 당당히 리더로 나서 기업을 진두지휘 하고 있다. 그룹 총수의 딸이 아니라 경영자로 거듭나기 위한 사회진출이 늘고 있다. 보수적인 오너 일가들도 점차 딸들의 경영을 허용하면서 적극적인 참여로 세간으 이목을 끌고 있다.

근래 들어 재벌가 딸들의 불꽃 튀는 경쟁이 화제 거리가 될 정도로 격렬하다.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여성들이 일제히 제빵 사업에 뛰어들면서 이슈가 되고 있다. 삼성가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롯데가의 차녀 장선윤 블리스 사장까지 잇따라 제빵 사업에 진출했다.

이부진은 외식계열사 ‘보나비’를 통해 커피 전문점인 ‘아티제’를 운영 중이다. 정 부사장은 베이커리 브랜드 '달로와요'와 델리 브랜드 '베키아 에 누보'의 지분을 보유했다. 여기에 장 사장도 롯데백화점 내 베이커리인 ‘포숑’의 고급화로 맞불을 놓았다. 일제히 고급 베이커리 사업에 뛰어들면서 제빵·커피 사업은 대기업의 격전지가 되어버렸다.

여성 경영자에게 유리한 패션 사업 경쟁 열기도 뜨겁다. 삼성가의 둘째딸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회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패션부문을 이끌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토리버치, 발렉스트라, 릭오웬스 등 해외 고급 브랜드를 차례로 수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수 천만원대 악어가죽 핸드백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콜롬보를 인수해 글로벌 패션 기업에 한 걸음 다가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세계 정유경 부사장도 청담동에 10여채의 유명 브랜드 건물을 보유하는 등 영토 확장에 열심이다. 정 부사장은 올해 초 기업분할을 통해 백화점과 수입 패션브랜드 사업을 하는 신세계인터내셔날 경영에 주력하고 있다.

부동산에 눈 돌리는 이유?

지금은 재벌가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낯선 일이 아니지만 창업 1세대에는 여성의 경영 참여 제한이 일반적 풍토였다. ‘암탉이 울면 집이 망한다’는 가부장적인 분위기로 인해 장자 중심으로 경영 승계가 이뤄졌다. 여성들은 주로 남편이나 아들의 그늘에 가려져 내조에만 전념하거나 미술관·박물관 등 문화 사업에 국한된 사회 참여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이런 현상은 옛 이야기가 됐다. 남편이나 아들의 몫을 지키기 위해 임시적으로 경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기업의 총수로 대외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패션·유통·커피·제빵 등 여성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업 위주로 해왔다. 하지만 이런 사업은 접근성이 용이한 대신 시장 변황이 크고 경쟁자도 많기 때문에 목돈을 만들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 남자형제들에 비해 뒤늦게 경영에 참여한 탓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어렵다. 남자형제들은 이미 굵직한 사업을 맡아 계열분리를 대비한 실탄 마련이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재벌가 여성들도 알짜 계열사를 차지하기 위한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바로 부동산 사업으로 눈을 돌린 것. 부동산 투자·개발을 통해 건설 등 다른 사업으로 뻗어나가거나 매각해서 알짜 계열사의 지분을 매입하기 위한 실탄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지난 2009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매입해 관심을 모았던 청담동 소재 빌딩에는 현재 이서현 부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토리버치 매장이 들어섰다. 또한 강남구 도산공원 앞에 위치한 3층짜리 단독 건물을 제일모직이 67억원에 매입해 ‘콜롬보’ 매장 겸 사무실로 사용했다.

지난해 삼성화재가 인사동 한 가운데에 있는 부지를 매입한 것도 딸들의 부동산 사업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인사동은 외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관광지로 분류된 만큼 호텔이 들어설 확률이 높아 이부진 사장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신세계 정유경 부사장도 지난해 청담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주차장 용지와 신세계 보유 코치 건물 뒤편에 위치한 요산빌딩도 사들였다. 요산빌딩의 매입가는 375억원으로 알려졌다.

롯데가에서도 3세들을 위한 부동산 매입이 이어지고 있다.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은 지난 2009년 도산공원 앞에 위치한 건물을 차녀 장선윤 앞으로 매입해 올해 명품 패션 브랜드 ‘폴 스미스’ 매장을 오픈했다. 또 강남구 신사동 651-1번지 건물을 175억원에 매입했다. 업계에서는 장선윤 사장이 고급 카페형 베이커리 사업에 진출하면서 도산공원 일대를 거점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처럼 여성 경영자들이 사업 다각화를 통해 실탄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형제간의 계열분리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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