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손해율 둘러싼 ‘남탓’ 공방… 보장성 강화에 전세 역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서 건강보험 보장강화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비급여 진료의 전면 급여화를 골자로 하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이 발표됐다. 의료계와 보험업계 간 희비가 엇갈렸다. 보험업계는 이번 정책의 골자인 비급여 항목 급여화가 과도한 실손의료보험 손해율을 낮추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는 이번 정책에 크게 반발하는 분위기다. 적정수가가 보장되지 않아 손해율이 커지면 장기적으로 의료업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의료계는 그간 낮은 수가로 인한 급여 진료 적자분을 비급여 진료로 메꾸고 있었다. 하지만 보장성이 커짐에 따라 이런 관행이 없어지게 됐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건강보험 체계가 사회주의화(化)되고 있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가 9일 발표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기존 시스템을 뒤엎는 수준의 파급력을 갖췄다. 기존 63%대에 불과한 건강보험 보장률을 70%대로, 장기적으론 80% 수준까지 올리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향후 3800개에 달하는 비급여 항목을 표준화하기로 했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올라가면 그만큼 다양한 의료서비스에 건보 보험금이 청구된다. 충분한 재원 확충은 필수적이다. 정부는 보장성 강화를 위해 올해부터 2022년까지 건강보험에 누적 30조6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에 현재 20조원인 건강보험 적립금 중 일부를 투입하고, 부족한 부분을 정부 지원금으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이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국장은 “현행 보험 체계에서 건강보험과 실손보험을 이중으로 내던 금융 소비자 입장에서는 비용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며 “당국과 이해관계자 등이 의견조율을 통해 소비자를 위한 건강보험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계는 이 같은 정부 정책에 반발하고 나섰다. 5년간 30조원이라는 재원은 적정수가라는 측면에서 봤을 땐 부족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의료수가는 병·의원이 건강보험 보장 항목을 진료하면 건강보험공단과 환자가 내는 비용을 뜻한다. 의료계는 현재 보장성 항목의 낮은 수가로 인한 적자를 비급여 진료비로 메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보험 보장률이 늘어나는 반면 의료수가는 그대로라면 이들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의료계는 이번 정부 정책이 그대로 시행되면 1차 의료기관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문을 닫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고려 없이 건강보험 보장률에만 중점을 둘 경우 누적된 저수가로 인한 진료왜곡 현상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며 “무리한 급여확대나 신포괄수가제의 성급한 도입은 또 다른 진료왜곡과 의료발전의 기전 자체를 붕괴시키고, 건강보험과 민간보험에 가입한 국민의 이중부담으로 민간보험사에 막대한 반사이익을 안길 수 있다”고 말했다.

주수호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도 본인 SNS에 “(병·의원들이)궁여지책으로 보험급여 진료 적자분을 비급여 진료로 벌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적정수가를 보장하기 위한 재원마련책이 미비한 상태에서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는 대폭적인 수가 인하와 다름없으며 이는 대다수 의료기관의 고사와 직결된다”고 말했다.

반면 손해보험업계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다. 실손의료보험 손해율이 이미 100%를 훌쩍 뛰어넘어 ‘팔면 팔수록 손해’였던 만큼 보장성이 강화되면 나갈 보험금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대책을 통해 비급여 가운데 비용 효과성이 떨어지는 비급여 항목은 실손보험 보장범위에서도 제외하도록 권고함에 따라 손해율은 더욱 줄어들 전망이다.

◆실손보험 손해율 책임 떠넘기던 의료계·보험업계, ‘전세 180도’ 역전

보험업계와 의료계는 실손보험과 건보 보장성을 둘러싸고 이미 수차례 ‘남탓 공방’으로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보험업계는 실손보험의 과도한 손해율을 의료계가 비급여 관리를 엉망으로 한 탓으로 책임으로 돌렸다. 또한 일부 부도덕한 병·의원들이 비급여 과잉진료를 하고 소비자에게 마늘주사나 도수치료 등 미용에 가까운 ‘의료쇼핑’을 독려한 탓에 손해율이 커졌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의료계는 실손보험의 국민 부담 증가는 전적으로 상품 설계를 잘못한 보험사 탓이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또한 실손보험의 과도한 손해율은 자신들 탓이기 보단 당국이 건보 보장성을 제대로 확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공을 정부에 넘겼다.

하지만 이번 정책 발표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강화됨에 따라 미용과 성형 등을 제외한 모든 의학적 비급여가 건강보험으로 편입되기 때문이다. 비급여 항목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던 의료계로선 수가가 늘어나지 않는 한 향후 수익이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한 의료인은 “적정수가 조정과 의료계 도덕적 해이 방지, 단일보험자 체제 해체 등 근본적인 의료개혁 없는 보장성 강화는 건강보험체계를 무너뜨릴 뿐”이라며 “의료 쪽이 완전히 사회주의로 넘어가고 있다”고 이번 정책 발표를 비판했다.

반면 손보사들은 보장성 강화에 따라 당국의 보험료 인하 압박이 이뤄지겠지만, 실손보험 손해율이 낮아지는 폭이 더 클 것으로 보고 있다. 실손보험의 비급여 보장률이 80%인 점을 감안하면, 이번 대책으로 보험사가 부담해야 할 의료비는 4조5000억원가량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HSBC는 이날 보고서에서 “당사는 보험사들에 대한 전체 의료비 청구비중 가운데 건보 혜택을 적용받지 못하는 질병에 대한 청구 비중이 10%포인트 감소하게 되면, 보험사들의 손해율은 1.1%p 개선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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