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부담금까지 대납하고 모셔가… “최종 피해는 정비업체와 소비자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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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 최근 운전 중 사고를 겪은 A씨는 가입한 차량보험 설계사가 ‘자기부담금’을 대신 내주겠다는 말에 혹해 한 보험사의 ‘우수정비업체’에 차를 맡겼다. 하지만 믿고 맡긴 차량의 정비 상태는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A씨는 정비업체에 항의했지만 업체 측은 “해야 할 수리를 다 했다”며 발뺌했다. 보험사에 연락해도 “규정대로 처리했다”고 하는 탓에 A씨는 ‘울며 겨자먹기’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보험사 직원들이 추천하는 우선정비업체를 이용한 보험 가입자들이 부실 정비를 겪었다는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문제의 원인에는 보험사들이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는 차원에서 운영 중인 ‘우수정비업체’ 제도가 악용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일부 자동차 보험 설계사들은 법적으로 보험 가입자가 내야 할 자기부담금을 대신 내는 식으로 정비업체에게 떠넘기고 있다. 이들 설계사들은 정비업체 매출 가운데 상당수가 보험사가 보내준 차량들로부터 나오는 점을 악용해 정비업체로부터 접대와 커미션 등을 받는 등 ‘갑질’을 일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준포 전남자동차검사정비조합 이사장은 “몇몇 보험설계사들이 고객이 내야 할 자기부담금을 우선정비업체들이 대신 납부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며 “영세한 정비업체들은 보험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어 결국 정비소와 소비자에게 그 피해가 이어지게 된다”고 밝혔다.

보험사의 자기부담금 대납은 현행 보험업법상 불법이다. 하지만 몇몇 보험설계사는 소비자가 내야 할 자기부담금 등을 대신 납부해주겠다는 식으로 소비자를 우선정비업체에 끌어들인 뒤 정비업체가 부담금을 내게 하도록 하고 있다. 보험설계사와 정비업체 관계가 철저한 ‘갑을관계’임을 악용하는 것이다.

손보업계는 부인하고 나섰다. 보험설계사와 정비업체 간 특별한 유착관계가 없는 이상 설계사가 굳이 나서서 소비자의 자기부담금을 내줄 만한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한 손보사 관계자는 “보험설계사는 보험 상품을 팔고 수수료를 받는 것이 일인데 굳이 자기부담금을 대신 내주면서 일을 만들 필요가 없지 않느냐”며 “일부 설계사가 정비업체와 유착관계가 있는 등의 일탈은 있을 수 있겠지만, 설계사 대부분의 사례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문 이사장은 이런 손보사 주장에 대해 “설계사와 우수정비업체 간에는 유착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며 “정비업체들은 설계사가 판매하는 장기보험 상품을 구입하거나 보험설계사 모임에 스폰서 역할을 하는 등 눈치를 봐야만 한다”고 반박했다.

문 이사장은 이어 “보험설계사들의 이 같은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다른 정비업체로 차량을 입고하는 등의 ‘갑질’을 벌여 정비업체를 경영난에 빠트리고 있다”며 “여기에 손보사들이 지난 15년간 관행적으로 보험수가도 올리지 않아 정비업계는 최근 빚을 지면서 사업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보험사들은 이 같은 관행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관련 피해 상황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보험사들이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보험사의 관행적 ’갑질‘, 정비업계 단체행동 불러

지난 4월 11일 오후 제주시 연동에 위치한 삼성화재 사옥 앞에서 제주지역 자동차 정비업체들이 모여 삼성화재의 불합리한 횡포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뉴시스

보험사와 정비업계 간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정비업계는 보험사들의 일방적 정비수가 책정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수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차량 정비에 있어서도 기존 매뉴얼이 아니라 시간이 단축된 매뉴얼을 적용해 시간당 공임비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 보고 있다.

지난 4월 제주도의회에서는 제주 지역 78개 자동차 정비업체가 속한 ‘제주도자동차검사정비사업조합’이 삼성화재를 상대로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제주지역 12개 삼성화재 우수협력업체는 삼성화재와의 정비 협약을 해지하겠다고 밝혔다.

현행 보험업법은 자동차 보험을 이용한 차량 수리시 발생한 수리비는 차량 소유자가 손해사정사를 고용해 수리 견적을 산정한 후 정비업소에 수리비를 지급하고, 이를 바탕으로 손보사에 수리비를 청구하도록 규정돼있다.

하지만 이 같은 법규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고 있다. 관행적으로 손보사가 파견한 사정사가 수리견적을 산정하고, 정비업소는 차량 소유주가 아닌 손해보험사에 직접 수리비를 청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수리비 산정에 있어 손해보험사 측이 견적을 낮게 책정하면 정비업소는 이를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자리에서 정비조합 측은 “삼성화재 측은 자동차 보험수리시 고객만족도보다는 보험사 비용절감을 중요시해 정상적인 차량 수리에 저해요인이 많다고 판단한다”며 “삼성화재가 정비업체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비수가를 결정해왔으며, 이에 소비자 정비 불만과 정비업체 운영난을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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