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가계부채 해소대책’ 2단계 조치… 금융소외계층 구제 VS 도덕적 해이 우려

[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정부가 부실채권을 연말까지 소각하기로 한 결정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조치는 정부 가계부채 해소 대책의 첫 번째 단계이며, 상법상 소멸시효인 5년이 지난 1000만원 이하 소액 채권을 탕감해주는 정책이다. 소각이 이뤄지면 채무자는 법적으로 빚을 갚을 의무가 사라지게 된다.

정부는 이번 결정으로 장기간 추심 압박에 허덕이는 채무자들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번 정책에 반대하는 측은 채권 소각이 국민 ‘혈세’가 투입될뿐더러, 채무자에게 “버티면 탕감해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까지 유발할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중구 서민금융진흥원에서 열린 소멸시효 완성채권 처리방안 금융권 간담회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3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이번달 말까지 국민행복기금과 금융 공공기관에 쌓인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자의 부실채권을 전부 소각하기로 했다. 소각대상 채권은 국민행복기금과 예금보험공사 등 금융공공기관이 보유한 소멸시효완료채권과 파산면책채권으로, 총 채무자는 123만1000명에 규모도 21조7000억원에 달한다.

정부는 또한 연말까지 민간부문의 부실채권도 소각하기로 했다. 정부 추산 채무액 4조원 안팎에 대상자는 91만2000명으로, 부실채권 소각이 이뤄지면 공공과 민간에서 총 214만명이 보유한 25조원 규모의 채무가 완전히 사라질 전망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번 정책은 금융소외계층에 금융 접근성을 제고하고 금융취약계층에 재기의 기회를 주는 ‘포용적 금융’“이라며 ”이번 조치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제도화·법제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소멸시효완료채권은 연체한 지 5년이 지나 법적으로 빚을 갚을 의무가 없어지는 채권을 뜻한다. 하지만 일부 불법대부업체는 법 지식이 없는 채권자를 속여 이미 완료된 채권을 부활시켜 채무 독촉을 하는 등 관련 피해가 커지는 상황이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국내 16개 은행은 지난해 3만9695명의 대손상각채권 소멸시효를 연장했다. 시효가 연장된 대손상각채권은 ▲2014년 3만3552명(원리금 1조1333억원) ▲2015년 2만9837명(7384억원) ▲2016년 3만9695명 (9470억원)으로 점차 늘고 있다.

◆“채무자 ‘도덕적 해이’” VS “채권자에 너그러운 환경”

사진=뉴시스

이번 정부 정책에 대해 일각에서는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하는 건 채무자 개인 문제인데 왜 정부에서 국민 혈세를 들여 빚을 탕감해주냐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부실채권 문제가 단순히 돈을 빌린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있다.

금융 전문가들은 이 같은 문제에는 정부와 금융기관도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다. 과거 정부가 경기 활성화를 명목으로 무분별한 부동산 정책에 치중한 결과 ‘빚 권하는 사회’가 만들어졌고, 금융기관도 채무자의 상환능력은 고려하지 않은 채 가계대출 규모를 늘려 손쉽게 돈을 버는 경향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최종구 위원장은 “외환위기 이후 생산적 분야보다 가계대출과 부동산금융 등으로 자금쏠림 현상이 더욱 심화됐다”며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이대로 두고 보는게 감독당국 역할이 맞는지, 이런 의문이 심각히 든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분들이 은행의 ‘전당포’식 영업행태를 비판하는데 그런 지적이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라며 “집값이 변동돼도 그 위에 다른 자산까지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상환능력에 대한 철저한 심사 없이 자금이 과도하게 공급됐다”고 진단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은행 총 대출 중 가계대출 비중은 1998년 27.7%에서 지난해 43.4%로 18년간 15.7%p 상승했다. 같은 기간 신한과 우리, 하나은행의 가계대출 비중은 각각 23.9%, 28.2%, 25.2%에서 51.0%, 54.0%, 53.7%로 두 배 이상 늘었다.

김수연 한화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가계부채가 처분가능소득보다 크게 증가한 것이 가계의 부담으로 작용해, 금리를 낮춰 가계의 상환 이자 부담을 줄여 소비를 촉진하겠다는 정책은 실패했다”고 진단하고 “가계로 하여금 가계부채 상환 장기플랜을 제공하는 것으로 가계의 부담을 줄이고 심리를 안정시켜 차후 소비를 진작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채권자에게 관대한 법·제도적 환경도 지적됐다. 현행법상 소멸시효가 지난 채권이라도 채무자가 단돈 100원이라도 빚을 갚으면 채무의무가 다시 살아난다. 또한 단 3개월만 연체하더라도 채권자 임의로 담보물을 매매할 수 있고, 불법추심에 대한 관리감독도 부실해 채무자가 피해를 보는 사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점 등도 문제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는 본인 SNS에 “담보비율(LTV) 규제는 너무 엄격한 반면 상환능력비율(DSR)은 턱없이 너그러운 한국만의 독특한 대출 관행이 생긴 배경에는 채권자에게 지나친 권리를 부여하는 법적 환경이 있다”며 “연체가 생기면 석달만 지나도 담보 잡힌 집을 경매에 붙일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빌려주는 사람 입장에서 채무자를 잘 선별할 인센티브가 약해진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과거 정부들이 펼쳤던 ‘채무 재조정’ 방식에 비해 새정부 정책이 채무자들에게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채무 재조정은 장기 채무자에게 원금 일부를 감면해주고 이자를 낮춰주는 방식으로 완전 소각보다는 약한 조치다.

형평성 문제도 제기됐다. 정부가 부실채권에 혈세를 들여 소각할 경우 성실히 빚을 갚아나가는 사람들만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금융위는 이에 대해 “빚 갚을 능력이 있는데도 15년 이상 추심을 견뎌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며 “이를 악의적으로 이용할 채무자는 많지 않을 것”이라 강조했다.

◆더민주 후속 법률안 예고… “채무자 삶의 질 위한 조치”

채무자 연체 기간별 현황. 자료=김기식 의원실

이번 발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후속 조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소액 장기연체 채권 소각은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3단계 가계부채 해소 공약’의 첫 단계로 내세운 정책이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로는 현행법상 5년인 채권 소멸시효가 완성된 ‘죽은 채권’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도록 채권 추심 관련 법안이 개정될 것으로 보인다.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소멸시효 완료 채권은 매각과 추심을 금지하고, 시효 임박 소액채권에 관한 무분별한 소송 제기와 매각 제한 등도 금지된다.

일부 대부추심업자들은 시효임박 채권을 싼 값에 사들인 뒤 시효를 늘리는 식으로 채무 독촉을 하고 시효가 다가오면 되파는 식으로 돈을 벌어왔다. 시효임박 채권의 소송과 매각을 제한하면 이처럼 법망을 교묘히 피하는 행위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3번째 단계는 개인채무조정 합리화와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법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신용채무만 존재하는 개인회생절차는 그 기간을 3년으로 단축해 채무자가 장기 채무의 ‘늪’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 또한 ‘금융소비자분쟁조정기구’를 설치해 소액 금융분쟁에서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화하는 조치도 이뤄질 전망이다.

앞서 채이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번 정책의 2단계 대책에 해당하는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대표발의로 제출한 상태다.

채 의원은 “불법채권추심은 채무자의 삶의 질 저하를 가져오며 이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시효로 소멸한 채권에 대해 양도를 막으면 채권을 싼 값에 매입한 대부업체가 채무자에게 다시 비싸게 청구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 밝혔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