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가치 폭락에 물량 대거 풀려… 혹사로 성능저하 우려

▲ 사진=flickr.com/photos/btckeychain/28519588324/

[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지난 몇 달간 매물조차 찾기 힘들던 중고 그래픽카드(GPU)가 최근 들어 시장에 대거 쏟아지고 있다. 비트코인·이더리움 등 가상화폐 가격이 내린 ‘후유증’ 탓인데, 지금 풀리는 중고 물량은 가상화폐 생산에 혹사된 ‘노예 그래픽카드’일 가능성이 커 구매에 유의해야 한다.

5일 하루 동안 중고상품 거래 커뮤니티 ‘중고나라’에 올라온 그래픽카드 판매 글은 700여건에 달한다. 불과 1달 전 하루 판매 글이 70~80여건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10배나 늘었다.

현재 중고시장에 나온 그래픽카드 가운데 대다수가 가상화폐 생산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그래픽카드들은 대부분 24시간 쉬지 않고 가상화폐 채굴 작업에 이용돼 ‘채굴 노예’ 등의 은어로 불리기도 한다. 중고 그래픽카드 구매자들에게 이런 제품은 ‘기피대상 1호’로 취급받고 있다.

◆가상화폐와 그래픽카드의 상관관계

가상화폐는 중앙기구가 찍어내는 실물 화폐와는 다르게 생산 주체가 없어 컴퓨터만 있다면 누구나 생성할 수 있다.

‘블록체인(Blockchain·분산형데이터저장방식)’ 기술이 적용된 가상화폐는 ‘블록’이라는 특수한 분산장부를 갖는다. 이 블록은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가상화폐 생산자가 특정 해시값(Hash)을 얻기 위해 ‘해시캐시(Hashcash)’라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생산자가 해시캐시를 풀면 그 보상으로 사용자에게 일정한 가상화폐가 주어진다. 쉽게 말해 문제를 풀면 돈을 준다는 뜻이다. 이 과정을 바로 ‘채굴(Mining)’이라 부른다.

해시캐시 연산 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은 32비트 명령어 수행 능력이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경영’보단 ‘노동’에 가까운 행위다. 그리고 컴퓨터 부품 가운데 32비트 연산 능력이 가장 뛰어난 부품이 바로 그래픽카드다. 중앙처리장치(CPU)로도 32비트 연산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래픽카드를 활용이 수십, 수백배 효율적이다.

가상화폐 가치가 오를 기미를 보이자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래픽카드를 대량 매입해 가상화폐 채굴장을 만들었다. 몇몇 ‘기업형 채굴가’들은 시중에 풀려야 할 수천 개의 그래픽카드를 한꺼번에 구매해 공장형 채굴소를 만들기도 했다.

▲ AORUS Radeon™ RX580 8G. 사진=기가바이트 홈페이지

한 가상화폐 채굴업자는 “이더리움의 경우 채굴기 한 대당 300만원 가량을 투자하면 전기세 등을 제하더라도 월 70만~80만원에 달하는 돈을 벌 수 있다”며 “몇몇 업자들은 채굴기 수백대를 돌려 억대의 돈을 벌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래픽카드 품귀현상은 지난 5월 중순 비트코인 가격이 400만원대까지 치솟자 절정에 이르렀다. ‘라데온 RX580 DDR5 8GB’ 신품 그래픽카드는 지난 5월 한달 간 30만원에서 70만원으로 2배 가까이 가격이 올랐다. 그마저도 구매에 최소 2~3주는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중고품 가격도 올라 30만원 초반에 구매한 그래픽카드를 몇만원 얹어 되파는 현상도 발생했다. 덕분에 컴퓨터를 구매해야 하거나 그래픽카드 교체가 필요한 사람들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그래픽카드 가격에 울상을 지어야 했다.

◆‘노예 그래픽카드’ 구매를 피해야 하는 이유

상황이 급변한 것은 지난 5월 하순부터다. 5월 25일 460만원으로 정점을 찍은 비트코인 가격은 단 이틀새 40% 가까이 폭락했다. 이더리움 등 주요 가상화폐 또한 최근까지 30% 가까이 가격이 떨어졌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자 손 털고 나오는 업자들이 늘었다. 때문에 채굴에 사용된 그래픽카드들도 중고 시장에 대거 출몰했다.

가상화폐 채굴에 사용된 그래픽카드를 중고로 구매하는데 신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픽카드 혹사 문제 때문이다. 그래픽카드는 소모품이라 일정기간 이상 사용하면 성능이 저하되고 심하게는 작동이 멈출 수도 있다.

일반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그래픽카드 수명은 대략 5년 안팎이다. 하지만 채굴공장에서 24시간 혹사당한 중고 그래픽카드는 개인이 사용했던 그래픽카드보다 상태가 좋지 않아 구매한지 얼마 안돼 고장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중고시장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그래픽카드와 채굴로 혹사당한 그래픽카드를 구분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포장 없이 벌크 상태로 파는 상품이나 재포장 상품, 묶음으로 파는 상품은 피하는 등의 팁이 돌아다니고 있다.

가상화폐 채굴에 자주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진 그래픽카드는 AMD사 라데온 RX 580, 570, 480과 엔비디아(Nvidia)사 지포스 GTX 1070, 1060, 1080Ti 등이다. 중고 그래픽카드 구매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해당 그래픽카드를 제외한 다른 제품을 알아보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해당 상품을 꼭 구매해야 한다면 중고보다는 신품을 구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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