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일호 기자.

[파이낸셜투데이=이일호 기자] 만 2달 된 한국은행 ‘동전없는 사회’ 시범사업의 중간 성적표가 나왔다. 편의점과 대형마트 등에서 현금 결제 후 나오는 동전을 카드사 포인트로 적립해주겠다는 발상이지만 성과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일평균 적립 실적 3만5000건, 개별 매장으로 치면 1.5건에 불과하다.

현금없는 사회로 나가기 위한 첫 단계란 점을 알면서도 씁쓸함을 지울 수 없는 건 최근 인구 10억명의 국가 인도가 현금없는 사회로 급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다.

인도는 2015년까지 상거래 98%가 현금으로 이뤄지던 신용 후진국이었다. 인도 국민 중 은행 계좌를 가진 비율이 절반에 불과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돈을 침대 밑이나 땅 속과 같은 깊숙한 곳에 보관하는 문화가 보편화돼있었다. 덕분에 최고액권인 1000루피(한화 약 1만7000원)가 전체 실물 화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6%에 달했다. 돈을 찍는 족족 땅속으로 사라지는 나라였다.

신용 거래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인도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 시행된 화폐개혁부터다. 최고액권인 1000루피 화폐를 없애고 500루피(약 8500원)와 2000루피(약 3만4000원) 신권을 만드는 게 골자다. 이 조치로 인해 그간 바닥에 수렴했던 1000루피권이 땅 위로 올라오게 됐다.

변화는 이 뿐만 아니었다. 인도 정부는 화폐개혁과 함께 전자결제와 간편결제 시스템 전면 도입에 나섰다. 상점이 QR코드로 결제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 독려했고, 서비스 이용자를 선정해 적게는 1000루피부터 많게는 1000만루피(한화 약 1억7000만원)까지 지급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사용자를 모으려는 유인책인 셈이다.

반응은 선풍적이었다. 인도판 ‘알리페이’라 불리는 인도 전자결제 업체 페이티엠(PayTM)은 화폐개혁 이후 신규 이용자 수가 1000% 급증해 인도 인구 13억명 가운데 1억5000만명의 이용자를 확보했다. 최근엔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가 PayTM 모회사인 One97 커뮤니케이션스에 약 14억달러(약 1조6000억원)의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가 놀라운 이유는 실물화폐 위주 경제 시스템을 가졌던 인도가 단 6개월 만에 실물카드, 즉 신용카드 단계를 뛰어넘어 디지털 결제 사회로 도약했기 때문이다. 도심지에서만 이용할 수 있던 간편결제는 가맹점이 하루 4만곳씩 늘어나 이제 인도 지방 지역 골목의 좁은 구멍가게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보편화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우리 인프라로는 무리’라는 고정관념을 깬 인도 당국의 적극적 정책 주도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 IT강국을 외치던 한국은 이제야 동전없는 사회 시범사업을 시행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당국은 교육·홍보 부족과 매장간 상이한 적립 수단을 이유로 들면서 ‘동전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동전 사용을 줄여보려는 시도’라는 점을 홍보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시범사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중국 유통업체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2020년까지 중국 내 현금이 사라질 것이라며 “거지와 노숙자도 QR코드로 구걸을 하게 될 것”이라 단언했다. 하지만 한국은 정부 당국의 탁상행정주의와 무사안일주의 덕분에 2020년에 동전이 사라질지 여부조차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현금없는 사회 직접 도입에 대해 “아직은 여건이 덜 성숙된 듯 하다”며 “현금없는 사회가 현실화되기 위해선 아직 여러 가지 거쳐야될 단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과연 정부 당국자가 생각하는 ‘여건’이 무엇이고 거쳐야 할 ‘단계’가 무엇인지 제대로 고민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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