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고급화로 승부…고질적인 내부거래는 ‘복병’

▲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이 지난 13일 열린 현대차 소형SUV 코나 월드프리미어에서 차량 설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현대차

[파이낸셜투데이=이건엄 기자] 지난 20년간 고공성장을 이어왔던 현대자동차그룹이 최근 대내외 악제로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국내에서는 대규모 리콜사태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품질경영’에 흠이 갔고, 글로벌시장에서 위상도 점차 떨어지고 있다.

이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이 구원투수로 나서는 모양새다. 고급차 브랜드 강화와 디자인 경영, 정보통신(ICT)분야와의 적극적인 협업 등을 통해 미래 성장동력 발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의 고질적인 내부거래와 승계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자칫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 부회장은 지난 13일 현대모터스튜디오고양에서 열린 코나 월드프리미어 행사에서 소형 SUV 코나를 직접 몰고 나와 차량 설명에 나섰다. ‘홍보맨’을 자처한 정 부회장의 파격 행보에 국내외 취재진 등 400여명의 이목이 집중됐다.

정 부회장이 디트로이트모터쇼 등 해외 유명 모터쇼에서 기조연설을 한 적은 있으나 국내에서, 그것도 단일 차종 발표를 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현대차그룹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 현대차의 지난달 판매량은 총 182만2115대로 전년동기 대비 6.5% 감소했다. 내수 판매가 같은기간 대비 0.6% 늘어나는 데 그친 반면 글로벌 판매가 7.7% 줄어들어 발목을 잡았다.

기아자동차는 내수와 글로벌 판매 실적이 전반적으로 악화됐다. 기아차의 지난달 판매량은 총 108만8215대로 전년동기 대비 8.5% 줄었다. 내수와 글로벌 판매량이 각각 20만8828대, 87만9387대로 6.9%, 8.9%씩 감소했다.

▲ 사진=뉴시스

이 같은 위기감은 최근 글로벌 판매량 순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영국 시장조사업체 자토다이내믹스가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글로벌 완성차업체의 올해 1분기 판매량을 종합한 결과 현대·기아차는 전년 동기보다 3.5% 감소한 총 174만7932대를 판매해 글로벌 판매량 5위다. 현대차가 1.6% 줄어든 108만9600대, 기아차는 6.5% 감소한 65만8332대를 판매했다.

6위인 포드는 현대·기아차를 바짝 뒤쫓고 있다. 포드는 올해 1분기 전년 동기보다 1.1% 하락한 153만2826대를 기록했지만, 현대·기아차의 판매 감소가 더 컸던 탓에 격차가 22만여대에 불과하다. 조사 범위를 상위 50개국으로 좁히면 현대·기아차와 포드의 격차는 3만2000대로 더욱 줄어든다. 즉 현대·기아차가 진출한 신흥국시장이 더 많아서 현재 판매량이 앞서고 있을 뿐 주요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많이 앞서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에서는 대규모 리콜사태에 품질 신뢰마저 무너졌다. 국토교통부는 지난달 청문절차를 거쳐 강제리콜 처분을 통보했던 현대·기아차의 차량제작 결함 5건에 대해 12일부터 순차적으로 리콜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리콜 대상은 12개 차종의 23만8321대다.

핵심은 디자인·고급화·ICT

정 부회장은 현대차의 암울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 중이다.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디자인 경영이다. 정 부회장은 피터 슈라이어 사장을 시작으로 루크 동커볼케 현대 디자인센터장과 BMW 출신의 크리스토퍼 채프먼, 토마스 뷔르클레 디자인센터장까지 기존 외인 4인방에 이어 사이먼 로스비의 영입으로 국내는 물론 미국·유럽·중국시장을 공략하는 디자인 협력 체계를 탄탄하게 갖췄다. 글로벌 디자인 협력 체계를 완성한 만큼 디자인 경쟁력 증진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또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를 통해 수익성 강화에도 힘을 주고 있다. 정 부회장은 지난 4월 24일 중국법인 베이징 현대의 판매 생산시설 등을 둘러보기 위해 출국했다. 정 부회장이 사드 문제로 얼어붙은 중국시장을 제네시스 조기 출시라는 승부수를 던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현대차는 2019년 중국에서 제네시스 브랜드를 출범할 계획이었지만 최근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면서 제네시스 중국 진출에 속도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제네시스 중국 진출 시기를 내년으로 앞당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다.

▲ 정의선 부회장이 지난 1월 3일 열린 CES에서 미래 모빌리티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현대차

정 부회장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인수·합병에도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한 영국 자동차 전문지 기자가 ‘다른 자동차 메이커를 인수할 계획이 없느냐’고 묻자 “현재로서는 인수할 계획이 없다”며 “향후에는 자동차기업 인수·합병보다는 정보통신기업 인수·합병이 활발해질 것이며, 그것에 대비해 역량과 문화를 키우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정 부회장의 발언은 커넥티드카와 자율주행차 등 첨단 자동차는 전통적인 자동차 업체인 현대차나 기아차의 기술력만으로는 개발이 불가능한 만큼 우수한 ICT업체를 적극 인수·합병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종종 터져 나오는 현대차와 국내 고객과의 소통 부족 논란을 의식한 듯 “현대차는 사람(고객)과 사람을 커넥트해주는 회사가 될 것”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내부거래 해결 시급

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 현대차의 고질적인 내부거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같은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갈 가능성도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일감몰아주기를 하는 대기업에 과세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오너일가의 상장사 지분율을 현행 30%에서 20%로 낮추는 등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들이 대거 국회에 발의돼 있다.

현대차그룹은 오너일가가 지분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일감몰아주기 규제대상이 되는 계열사 수를 2015년 5곳에서 지난해 2곳으로 줄였다. 이노션,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현대오토에버가 규제대상에서 벗어났으며 현대머티리얼, 현대커머셜은 여전히 규제대상이다.

일감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돼 대상 기업의 오너일가 지분율이 현행 30%에서 20% 낮아질 경우 이노션과 현대글로비스는 또다시 규제대상이 될 수 있다.

이노션은 정성이(정 부회장 누나) 이노션 고문이 27.9%, 정 부회장이 2%를 보유하고 있고, 현대글로비스는 정 부회장이 23.2%,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6.7%를 들고 있다. 지난해 이노션과 현대글로비스의 국내계열사와 내부거래 매출액(비중)은 각각 2296억 원(54%), 2조5220억 원(21%)이었다.

특히 현대글로비스는 일감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 오너일가 지분을 파는 식으로 규제를 피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정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자금줄로 꼽히는데 주식가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정 부회장이 당장에 보유지분을 팔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정 부회장은 2015년 초에 주당 20만원 초반대에 현대글로비스 일부지분을 팔았는데 현대글로비스 주가는 현재 16만원대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은 일감몰아주기 규제와 승계자금을 마련하는 문제가 엮어 있어 고심이 깊을 것”이라며 “현대글로비스가 기업가치를 높이는 일은 일감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 이뤄져야 하는 속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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